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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1부 침묵하는 바둑판 (3)

2007 조회 3978추천 0 프린트｜스크랩

통상 귀한 바둑판은 보를 씌우기 마련이었고 그 보는 고급의 비단천이나 무명, 드물게는 올이 고운 세모시로 만들기 마련인데 일별해도 진귀한 바둑판임에 틀림없어 보였는데 왜 거친 삼베로 보를 씌웠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며칠 전 서재에서 복기를 하던 국수의 심각한 모습과 그 바둑판이 연관되어졌다. 그때는 국수의 행동거지에 정신이 팔려 소홀히 보았으나 당시 복기를 하던 바둑판이 바로 그 바둑판이었고 박 화백의 기억에 국수가 황급히 반면을 덮어씌운 보는 확실치 않지만 그 바둑판에 덮인 삼베보로 여겨졌다. 박 화백이 이런저런 사념에 잠겨있을 때 국수가 착점을 하며 한마디 건넸다. 「그림은 어떠신가?」「…….」 박 화백은 국수를 바라보았다. 「바둑은 너무 어려워. 타고 태어나야 하거늘…….」 국수가 가늘게 한숨을 쉰다. 「그래서 천품(天品)이라 하질 않습니까?」「천품이라…….」 국수의 눈이 감길 듯 말 듯한다. 「고천은 기리(棋理)를 존중했고 청원은 기리를 버렸어…….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명인이라고 부르지.」 착점을 하는 국수의 손길은 부드러움을 넘어선다. 자유자재요, 유유자적이다. 「외람됩니다만 국수님께선 양쪽을 다 취하지 않았습니까?」 국수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박 화백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 틀려서라기보다 경솔함 때문이다. 자신이 국수의 바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상(相)이란 본시 허망한 것일세.」 국수의 입가에 뒤늦은 쓸쓸함이 지나간다. 박 화백은 안쓰러워 반면으로 눈길을 돌린다. 종반에 접어든 바둑은 그대로 가면 최소한 열 집 가량 흑이 남는 국면이었다. 기대했던 국수와의 대국이었으나 바둑은 무미건조했다. 박 화백은 다시 예의 바둑판을 떠올렸다. 대국을 하면서도 줄곧 신경이 쓰이던 바둑판이었다. 판을 덮고 있는 변색된 삼베보와 기묘한 반각의 형태, 보에 가려 있었으나 범상치 않은 기반의 골격,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날 그 바둑판 앞에서 복기를 하던 국수의 행동거지였다. 그때 국수는 복기를 한다기보다 누군가를 상대로 대국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박 화백은 펀뜻 국수가 자신을 발견하고 접어버린 낡은 기보를 기억해냈다. 그것은 기보라기보다 얼핏 보아 손으로 직접 그려 만든 기록용지에 가까웠다. 기록용지에 불과한 그 기보를 들여다보던 국수의 황망한 모습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생각할수록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금은 은퇴했으나 한국 바둑의 대국수(大國手)인 정명운 국수의 집에 그러한 바둑판이 있다는 것이 더욱 박 화백을 의혹에 빠뜨렸다. 박 화백은 내친김에 그 바둑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로 작정했다. 국수는 승패를 떠나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었다. 몇 차례 대화는 있었으나 쉽게 근접될 사람이 아니라고 박 화백은 생각한다. 마음과는 달리 선뜻 바둑판에 대해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박 화백이 이런저런 궁리로 머뭇거릴 때 국수가 혀를 찼다. 「별로 더 둘 데가 없는 것 같군…….」 돌을 거둘 기세다. 때를 놓칠세라 국수의 그 말에는 아랑곳없이 박 화백은 기어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문갑 옆에 있는 삼베로 덮은 바둑판을 보았습니다…….」 순간 국수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돌을 쥔 손이 떨리고 국수의 눈언저리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일순간의 일이었으나 박 화백은 국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국수의 얼굴은 서서히 상기되고 있었다. 태연한 척 애를 썼으나 안색은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박 화백은 심상찮은 국수의 모습에서 더 이상 다른 말을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국수는 앉은자리에서 한 점 미동 없이 반상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왜일까? 바둑판 이야기가 나오자 왜 국수가 돌변하는 것일까. 국수의 파격적인 변화 앞에 박 화백의 의문은 더욱 짙어갔다. 그 바둑판에 얽힌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단 말인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박 화백은 갑자기 자신이 그 바둑판 속으로 아득히 빠져드는 것 같았다. 박 화백에게 있어 바둑은 그림을 제외한 유일한 유희의 수단이었고 경외의 대상이었다. 젊은 시절 바둑에 빠져 긴 세월 방황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터득한 것 없이 시간만 흘렀고 생각만큼 뛰어난 고수가 되지도 못했다. 그 방황의 시간이 지난 뒤 박 화백은 다시 본업(그림)으로 돌아왔으나 흑, 백의 돌은 늘 마음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국수는 여전히 반상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굳은 얼굴로 반상을 쏘아보던 국수가 이윽고 돌을 들어 한 수를 놓았다. 그러나 돌은 조금 전과는 달리 매서운 손길로 판 위에 떨어졌고 수 또한 지금까지의 평이한 수가 아닌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수였다. 바둑이 거의 종반에 접어든 관계로 이렇다 할 승부처가 없다고 박 화백은 생각했으나 국수의 한 수 한 수는 박 화백의 그런 생각을 비웃듯이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묘한 역 끝내기 수순에 변을 틀어막자 십여 집의 차이는 별안간 칠, 팔 호로 줄어들었고 안형이 풍부해 살아 있는 것으로 버려두었던 중앙의 흑말에 절묘한 선치중으로 대마를 위협하며 그 대가를 요구하자 다 이겨놓은 한 판의 바둑은 순식간에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혼미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박 화백은 뒤늦게 살아난 승부심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갈증을 느끼며 장엄한 국수의 기(氣)와 힘에 맞서보나 흐름은 이미 국수에게 넘어갔다. 국수는 계속 비틀고 추궁했다. 국수의 수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냉정하게 반상 전체를 흔들었다. 박 화백은 섬뜩했다. 누가 보더라도 끝난 줄 알았던 바둑이 이렇게 다시 살아 숨쉬다니, 자신도 그리 무지한 바둑은 아니질 않는가. 참으로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박 화백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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