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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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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1회] 1부 침묵하는 바둑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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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수님, 저를 괘념치 마십시오.」 박 화백이 정 국수(國手)에게 한 말은 이 한 마디뿐이었다. 그러고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정 국수를 바라보다 돌아가곤 하였다. 화단 바둑계의 일인자로 통하는 박민수(朴敏洙) 화백이 근대 바둑사의 거목인 정 국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국수의 집에 드나든 지가 어느새 한 달이 넘었다. 처음 정명운(鄭明雲) 국수와 대면한 자리에서 정 국수의 얼굴과 품세를 본 순간 박 화백은 감동했다. 비록 늙고 쇠약해 있어도 근대 바둑사의 거목답게 정 국수에겐 명인(名人)의 품위가 배어나왔다. 정 국수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한일기원의 요청이 들어 왔을 때 개인전을 목전에 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바둑에 미처 앞 뒤 없이 무조건 그리겠노라며 승낙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연 화선지위에 평생을 19로의 반상을 누비며 승부로 점철된 지나온 국수의 삶을, 그리고 이제는 승부를 떠나 관조의 시선으로 반상을 바라보는 지금의 정 국수를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일어났다. 정 국수는 주로 거실에서 옛날의 기보(棋譜)를 꺼내 놓고 복기(復碁)를 하곤 하였다. 편안한 정 국수의 일상을 대하면서 박 화백은 쉽사리 붓을 들지 못했다. 욕심이긴 하나 박 화백은 정 국수의 초상화에 그 옛날 전성기 때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한 승부사의 면목과 바둑판 앞에서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마치 반상을 녹여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승부의 집념을 불태우던 정 국수 특유의 기개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역에서 은퇴하여 사저에 칩거하고부터 그에게선 승부의 여운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산사의 고승처럼 범속을 초탈한 무심의 경지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저래 박 화백의 의도는 무산되고 하루하루 시간을 허비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늦은 오후의 따뜻한 일광이 거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흡사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집 같았다. 낮 시간에는 주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정 국수가 그날따라 그곳에 없었다. 따악. 박 화백이 정 국수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재 쪽이었다. 평소 거실에서 복기를 하던 정 국수가 오늘은 서재에서 바둑돌을 놓고 있었다. 박 화백은 무심코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정 국수는 서재에서 복기를 하고 있었다. 서재 안으로 들어서던 박 화백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저물어가는 햇살 속에서 정 국수는 잔뜩 움츠린 자세로 바둑판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 국수의 분위기가 평상시와는 달랐다. 서재에서 복기를 하는 것도 뜻밖이거니와 복기에 임하는 정 국수의 자세도 평소와는 달리 완만하거나 여유롭지 못했다. 정 국수는 심각하게 바둑에 몰입해 있었다. 박 화백이 방안으로 들어온 사실도 의식치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그 모습은 흡사 상대를 마주하고 지금 당장 바둑을 두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 국수의 생경한 품세에 박 화백은 한동안 멀거니 정 국수를 바라보았다. 낯설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감동이 박 화백의 가슴에 차올랐다. 박 화백은 자신도 모르게 정 국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순간 박 화백과 정 국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박 화백을 발견한 정 국수의 낯빛이 확연히 변하더니 정 국수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팽팽한 기운이 일순 흐트러졌다. 정 국수는 별안간 판 위의 돌을 허겁지겁 쓸어 담았다. 흑돌과 백돌이 되는 대로 뒤섞여 돌통 안으로 들어가고 정 국수의 손에 들려 있던 기보 용지가 반면 위에 놓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바둑판은 기이한 보(褓)에 싸여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얼핏 보아 정 국수의 손에 들린 기보는 틈만 나면 들여다보던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책자로 묶은 기보집이 아닌 오래된 낡은 한 장의 종이였다. 정 국수는 손수 그 무거운 바둑판을 들어 문갑 귀퉁이 쪽에 옮겨다 놓았다. 거실에서 박 화백과 정 국수는 마주 앉았다. 정 국수의 얼굴은 아직 상기되어 있었고 눈빛은 어둡고 강렬했다. 처음 대하는 정 국수의 고뇌스러운 모습에서 박 화백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승부사의 일면을 엿보았다. 박 화백의 가슴속으로 어떤 영감이 밀려들었다. 그래, 바로 이 얼굴이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얼굴이 아닌가. 번뇌하는 인간의 얼굴이 아닌가. 국수의 모습에서 투혼의 흔적을 감지한 박 화백은 비로소 선반 위에 놓아둔 벼루를 꺼내 먹을 갈기 시작했다. 벼루에서 진한 묵향이 흘러나왔다. 거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열어젖힌 들창 밖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정원에 만발한 국화 향기가 거실 안으로 스며들어 묵향과 국향은 이내 혼연일체가 되었다. 박 화백은 그렇게 사흘을 먹을 갈았다. 박 화백의 눈이 번쩍 떠졌다. 화선지를 앞에 놓고 근 한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던 박 화백이었다. 떠진 박 화백의 투명한 시선이 서재 한켠에서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명운 노국수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박 화백의 눈에서 삼엄한 광기 같은 빛을 발견한 노국수가 무어라 의문을 표시하기도 전에 박 화백의 눈이 다시 감겼다. 깊은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박 화백이 눈을 떴다. 이미 그의 눈은 호수처럼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붓을 들고 며칠 전부터 단계연(端溪硯)에 갈아온 먹물을 듬뿍 묻혔다. 그리고 왼손을 더듬어 사방 오 센티미터 정도 자른 화선지 한 장을 입에 물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탁기가 화선지에 옮겨 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그 옛날 명검을 만드는 장인들이 즐겨 쓰던 수법이었고 역대의 수많은 명검사들이 자신의 칼을 갈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호흡을 가늠하던 박 화백이 붓을 들어 화선지에 첫 점을 찍는 순간…… 점은 선이 되고 선은 생명으로 피어올라 그 생명의 기운이 화선지 전체로 물들어갔다. 약간 불거진 광대뼈는 노(老) 국수의 고집스러움을 말하고 있고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과묵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마의 잔주름은 일제시대 때부터 오직 바둑으로 일도정진해온 노 국수의 파란만장한 생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늘게 떠진 눈매는 어쩌면 이 시대 후로는 보기 힘든 진정한 승부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탈진하여 붓을 놓은 그의 입에 이제까지는 한 점 떨림 없이 물려 있던 화선지가 폭풍을 만난 가랑배처럼 거칠게 펄럭였다. 화선지 위에 또 하나의 정 국수가 숨을 쉬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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