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行

눈을 뜨니 바로 앞 바둑 판 두 조가 놓여있던 다이는 텅 비어있다.

내 앞에서는 연구생이 흑을 들고 두고 있었고 그 가 두 집을 이긴 후 다시 새 판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졸다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 곁에 같은 다이에서는 빛나리와 감리단 김 단장이 두고 있어 심사장과 강이 관전을 하고 있었었는데 모두 자리가 비었고 썰렁하다.

나 혼자 졸다 깨어 무안한 심정이다. 내가 앉아 있는 다이는 바로 곁에 단골 둘이 바둑을 두고 있고 내 건너 의자에는 그들의 가방들이 놓여있다. 그들의 친구는 서서 관전을 하고 있다. 내가 예의도 없이 남들 두는 바로 곁에 앉아 졸기만 한 것이군!

4층이 기원이고 6층이 내 오피스 이지만 중간에 들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곤 4층을 지나쳐 6층에 내리기 십상인데 오늘은 바둑통과 바둑알이 보고 싶었다. 오늘을 기억하려면 바둑 벗의 영면을 기억하려면 나 스스로에게 이벤트와 각인이 필요할 듯싶었다.

고성에서 대구에서 공주에서 수원에서 원주에서 북한산에서 뵈었던 선비만석 성님이 가셨다니 병원에서 매일 죽음을 대하며 장례식장 앞에서 자주 종일 담배를 태우던 나 이지만 죽음이 그리 쉽게 나와 가까운 이 에게도 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이제야 깨닫게 된다.

가끔 주시던 전화 목소리 그 분의 전화에 감사하고 기쁘면서도 내가 먼저 전화 해 본 적은 없었지.

처음 대구 팔공산자락에서 오로6단 이라는 그분의 호쾌한 바둑에 초반부터 몰리며 빈삼각을 두 번 두며 기다리다 그분의 잠시 숨 고르는 틈에 뒤집어 간신히 이겼다. 내기꾼의 한칼이 온라인 호쾌한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었지만 세상사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데 싶었다. 고성에선 즐거운 모임을 선사하기에만 바쁜 그 분의 무심한 손길을 승부사의 악착으로 이긴 것에 기쁘기만 했다. 공주에선 악착같은 근성을 이미 알고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그 분을 혈국으로 이겼다. 수원에선 불원천리 먼 길을 바둑 벗들을 즐거이 찾은 그 분을 반상의 승부에만 집착하는 소인배의 근성으로 또 이겼었다. 백번을 더 이겼던들 무슨 소용이랴. 그 커다란 품으로 서양 사람처럼 온몸으로 껴안던 그분의 허깅 이 낯설었지만 그것이 그분의 세상 모든 것을 모든 이를 껴안는 포옹이고 포용 이었던 것을 그 큰 사랑 속에서도 바둑알만 고집스레 만지작거리며 키를 재던 소인배인 나를 그리 껴 안아주던 사랑을 몰랐던 바보는 이제야 그 분의 큰 가슴이 그립다.

병원에서 점심식사 중 선달아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고를 듣는다.

오늘 새벽 가셨다니 바로 달려가 2박3일 실컷 울며 고인을 그려야하는데.

오늘 내일 신입직원들의 교육과 배치에 자리를 비우기도 쉽지 않다. 새로 입사한 새 직장의 기대와 불안을 살아있는 자 들에게 나라도 신뢰와 안심 편안한 마음을 줄 수도 있어야 겠지. 내일은 떠나자 모든 것을 잊고 그분을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남겨보자. 남이섬으로 가평으로 춘천호반으로 젊은 시절의 유원지들이고 머나먼 곳이었던 추억들 이지만 이제 춘천은 나의 바둑 벗을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던 길로 영원히 기억되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