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가 넘어서야 꼰충호는 눈을 비비며 기원 골방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다. 머리는 산발이고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어 흐느적흐느적 정신없이 걸어 나오는 꼴이 천상 잡귀의 몰골이다.

언젠가 오전에 바둑을 배우러 오는 아가씨중에 농협에 다니는 순진한 아가씨가 한 명 있었다. 그 아가씨가 한번은 골방에서 나오는 충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여린 마음에 그만 울고 말았다. 그것을 충호는 아가씨가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를 해서 그 날 이후 계속 그 아가씨만 보면 집쩍거리다가 결국 아가씨의 직장 남자 동료에게 개망신을 당한 뒤 그 짓을 그만 두었다.

기원 실내엔 벌써 손님들이 절반 이상 가득 차 있다. 때마침 얼마 전부터 기원을 들락거리며 충호에게 돈을 보태 주던 호구가 상대를 만나지 못해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순간 호구를 발견한 충호의 느린 발길이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매의 속도보다 더 빨라진다.

「안녕하슈. 어제는 안 보이더니.」

「집안에 일이 있어 못 나왔다 아인교.」

호구가 의외로 충호를 보고 반가워한다.

「걱정했다 아인교. 어디 몸이라도 아픈 줄 알았다 카이.」

두 사람은 거두절미하고 방내기로 나간다. 두 판을 중간방 이상으로 맞은 호구가 한 호흡 가다듬는다.

「도대체 우째야 바둑이 느는교?」

충호가 호구를 대뜸 나무란다.

「우짜다니. 나 같은 고수하고 계속 두마 는다 카이.」

호구는 두 판을 더 보태 주고 돌을 거두며 괴로움을 토로한다.

「진짜 바둑 세지는 비결이 뭔교. 내가 지금 4급인데 내 소원이 더도 덜도 말고 딱 1급이라 카이요.」

충호가 점잖게 호구를 타이른다.

「1급이 어디 장난도 아이고. 그냥 두어 가지고는 절대 1급이 안 된다 카이요. 1급이 될라카마 고생을 많이 해야제.」

「책을 보마 는다 카던데?」

「책 그거 아무리 봐도 안 늘구마. 우짜다가 책 보고 1급 됐다카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 말짱 황이라요. 그카다가 잘못하면 어디 가서 개망신당한다꼬. 일 저지르기 전에 책 보고 그런 짓 하지 마라 카이.」

「그라마 우째야 되능교?」

「그라이 내가 안 카나. 야통을 하라꼬. 바둑의 시작이 야통이라 카이. 바둑 1급 두는 놈치고 기원에서 야통 1, 2 년 안 했는 놈 어디 있는교. 바둑 두는 놈이 집에나 들어갈 생각하마 큰일 난다꼬. 기원을 내 집처럼 생각해야 된다 카이. 안 그런교 원장님?」

장 원장이 충호 말에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충호 니 말 중에 기원을 내 집처럼 생각하라 카는 그 말은 참 내 가슴을 울리네. 사실 바둑 두는 사람이 그런 각오는 있어야제. 충호 니는 잘 알겠지만 그 길이 얼매나 힘들고 외롭노. 충호가 오늘 최고 학부 출신답게 말을 신중히 잘하네. 서양아! 충호 커피 한 잔만 갖다 조라.」

「내가 이바구 하나 하께 들어 보소.」

충호는 원장의 커피 한 잔에 신바람이 났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임(林)이라고 기원에서 매일 내기바둑을 두는 사람이 있었제. 하도 집에를 안 들어가이 하루는 그 사람 마누라가 애들을 데리고 기원까지 찾아온 기라. 남자가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바둑만 두자 마누라가 홧김에 애들을 기원에 내팽개치고 혼자 가 버렸는 기라. 애들이 옆에 앉아 있으이 보기가 뭐해 누가 남자한테 옆에를 신경 쓰라 캤더니 남자가 옆에 애들을 보더니 뭐라 캤는지 아는교?」

「뭐라 캤능교?」

호구가 잔뜩 긴장을 한다.

「너거들 어서 집에 가라. 엄마 아빠 기다린다. 그랬다 카이.」

「진짠교!」

「바둑에 미치마 그래 된다 카이. 지 자식도 못 알아본다꼬.
내 이바구 나온 김에 하나 더 하께. 이 양반도 바둑에 환장했는 사람인데, 하도 집에를 안 들어가이 이번에는 여자가 기원에 와서 남자 멱살을 잡고 집으로 끌고 갔다 카이. 집에 끌리간 남자가 밤이 되자 잠이 오나. 기원에 가고 싶어 미치고 환장하는 기라. 거기다가 마누라가 혹시나 싶어 남자 옷을 모조리 장농 속에 처집어 넣고 장농 문을 열쇠로 걸어 놨다꼬. 그라이 남자는 빼도 박도 못하고 생겁씹하는 기라. 그러다가 남자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내복 바람으로 야밤에 기원으로 튀었다 카이.
그런데 문제는 마누라가 남자 튀는 걸 눈치 채고 부엌칼을 들고 뒤쫓아온 기라. 밤에 남자는 내복 바람으로 튀고 여자는 속옷 차림으로 부엌칼을 들고 뒤쫓아가고, 그기 사람이 할 짓이가. 헐레벌떡 기원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웬 독립군이 동네 사람 보기 안 부끄럽던교 하니까 남자 말이.」

「남자 말이!」

호구가 침을 꿀꺽 삼킨다.

「캄캄한 밤이라서 아무도 못 봤다 카더라꼬. 그라고 내복 차림으로 몇 날 며칠을 기원에서 짜장면 시켜 먹어 가며 바둑을 뒀다 카이. 나중에 보이 내복이 새카맣더라꼬.」

「진짠교!」

「진짜나 마나 충호 니 이야기를 들어 보이 그 사람들 정성이 갸륵하네. 이런 사람 이야기는 어떠노.」

원장이 나서는데 기원 여급인 서양이 커피를 가져온다. 예쁘장한 얼굴에 작은 키지만 다리가 미끈하다.

「내가 구청 앞에서 기원할 땐데 그 사람도 매일 기원에서 방내기만 두었제. 그러다가 한번은 집엘 갔다 오겠다 카길래, 그래 처자식 보고 싶을 때도 됐다 싶어 내가 갔다 오라 캤지. 근데 집에 간다꼬 나간 사람이 얼마 안 되가 초저녁에 다시 돌아왔더라꼬. 그래서 내가 집에 간다 캐놓고 와 이래 빨리 왔노 카이 그 사람 말이.」

「말이!」

호구가 다시 바짝 매달린다.

「집이 이사를 갔다 카더라꼬.」

「진짠교!」

「진짠교, 진짠교. 이 양반이 어디서 속고만 살았나. 그거 내가 거짓말 시키가 뭐 하겠노.」

「진짜 집이 이사를 갔다꼬요!」

「예수 믿는 사람들 예배당 가는 거 그거 여기 비하마 아무 것도 아이라 카이.」

충호가 가슴이 뜨끔한다. 원장이 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언젠가 자신도 간만에 집에 들어갔더니 마누라가 애들을 데리고 이사를 가 버렸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간신히 이사 간 곳을 찾긴 찾았으나 자칫하면 처자식과 생이별을 할 뻔했다.

「모든 기 다 정성인 기라. 오로지 기도정진을 위해 기원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마 맨정신으로 다 이야기 못한다 카이. 그거마 생각하마 내가 밤에 잠을 못 잔다꼬. 처자식까지 헤어져서 수많은 날을 고통으로 살았으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꼬 그 사람들 언젠가는 복받을 끼라.」

말을 마친 원장이 입술을 지그시 문다.

장 원장은 천의무봉이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전부 맞는 말이요, 경우에 따라선 전부가 틀린 말이 된다. 여기 가서는 이 말이 맞고 저기 가서는 저 말이 맞다. 얼렁뚱땅 넘어가는 언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게 너무 심해 독립군들에게는 장 원장이 힘든 상대다. 그러나 독립군들도 원장을 무시하고는 독립군 생활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관계로 가급적 서로 시비를 피한다.

한번은 사까다와 임해봉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 기객이 원장과 독립군들 앞에서,

「임해봉이가 아무리 세다 하나 아직 사까다의 기력엔 못 미치지 않겠소, 장 원장?」

그 말에 원장이,

「그라문요. 경륜이 있는데 그기 함부로 됩니까. 해봉이가 뛰어 봐야 사까다 앞엔 개발에 다갈인 기라요.」

노 기객이 사라진 뒤 1분도 안 돼 단골 기객이 한 명 들어왔다. 하필 그 기객이 또 사까다와 임해봉의 이야기를 했다.

「면도날(사까다)도 한물 갔어. 이젠 임해봉이가 사까다보다 바둑이 더 센 것 같습디다, 원장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원장은 독립군들을 보고,

「봐라! 뭐라 카더노. 내가 해봉이가 더 세다 안 카더나!」

원장의 말에 독립군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아연실색,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한참을 넋이 빠진 채 가만히들 있었다.

갈수록 원장의 그 버릇이 심해질 무렵, 멋도 모르는 애송이 기객 한 명이 원장의 행동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원장을 몰아붙였다.

「원장님. 여기 가서는 이카고, 저기 가서는 저카고 도대체 와 그카능교!」

그 말에 대한 원장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원장은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한 모금 길게 내뿜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우리 집 큰아이가 내년에 대학을 졸업하네.」

원장은 고개를 떨구고 기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후로 원장에게 그런 말을 물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씨는 도대체 야통을 얼마나 했는교?」

호구가 궁금한지 충호에게 물어 본다.

「내야 오래 됐지. 10년은 넘었을 꺼로. 야통을 하도 오래 하다 보이 계산이 잘 안 되구마.」

「정말 대단하구마.」

호구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충호를 올려다본다. 이제 40 이 갓 넘은 충호의 나이가 오늘따라 유독 더 들어 보여 보통 때 50으로 보이던 것이 오늘은 60 이 다 되어 보인다. 충호와 호구의 방내기가 다시 벌어진다. 그때 기원 문이 열리고 잘 생긴 미남 청년 삼보가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