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시 마쓰히데(白石光秀)는 근래 들어 내기바둑계에 새로이 등장한 인물이었다. 현재 20대 후반의 나이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관북지방 히로사키(弘前)의 시골 바둑꾼으로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존재였다.

그런 그가 한 전주의 눈에 띄어 그의 지원을 등에 업고 2년간 바둑공부에만 매달린 후 중앙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이름 없는 무지렁이 시골 바둑꾼이 아니었다.

연전연승. 그의 앞에는 적수가 없었다. 그는 공포의 승부사로 돌변했다. 지난 1년간 큰 승부에서만 24승 무패라는 경이적인 기록이 말해 주듯 그는 이제 명실공히 최고의 승부사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와 한번 승부를 해 본 사람들은 승패를 떠나 그가 의심할 데 없는 슈사쿠(秀策) 이후의 최고의 기재라고 칭찬했다. 한낱 내기바둑꾼에 불과한 사람을 너무 극찬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하면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지금 당장 오청원이나 기다니와 승부를 해도 나는 시라이시에게 걸겠다.’라고 하며 반론에 제동을 걸었다.

언젠가 사석에서 누가 시라이시에게 물었다. 왜 그런 실력으로 일본기원에 정식 기사로 등록하지 않느냐고, 그리하여 바둑계를 석권할 생각이 없느냐고. 그 질문에 시라이시는 씨익 쪼개며 이렇게 대답했다.

「명예를 중시하라는 건가요?」

시라이시가 간명하게 표현했지만 그 말은 그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역사상 유례 없는 내기바둑 천국이었다.

전문기사들은 명예의 대상이었지 수입은 보잘것없었다. 승단대회, 지도대국 등에서 대국료가 일부 나오긴 했으나 그것은 잔돈에 지나지 않았고 제대로 된 돈을 만질 수 있는 승부는 그나마 내기바둑뿐이었다. 훗날 일본 바둑을 제패하는 불세출의 승부사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도 관북지방과 관서지방을 떠돌던 소년 내기바둑꾼이었다.

그런 시라이시에게 마쓰모토가 내세운 선수들이 연패를 당하자 마쓰모토가 설욕의 칼을 갈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고, 그 참에 평사가 나타났으니 마쓰모토에게 평사의 등장은 천군만마의 지원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쓰모토의 오판이었다.

전초전 삼아서 마쓰모토가 주선한 세 번에 걸친 내기바둑에서 평사는 불가사의하게도 세 번 내리 참패를 당했다. 평사를 잔뜩 믿고 판돈을 높게 책정한 마쓰모토는 큰돈을 잃고 깊은 회의에 빠졌다.

마쓰모토와 게이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패배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마쓰모토는 평사를 충분히 쉬게 한 후, 며칠 후 다시 승부에 투입했다. 마쓰모토는 평사의 패배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만큼 평사의 패배는 마쓰모토에겐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번에도 평사의 두 번에 걸친 연속 패배로 끝이 났다. 그 바둑을 끝으로 큰 충격을 받은 마쓰모토는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 평사에게 잔돈 몇 푼을 쥐어 주고 미련 없이 평사의 곁을 떠났다.

얼마 후 유통업을 하는 히로시마 출신의 사업가가 평사의 과거 화려했던 명성을 높이 사 새로운 평사의 전주로 들어섰다. 평사는 그가 주선한 바둑에서 또다시 4전 1승 3패의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되자 결국 그 전주마저 평사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히로시마로 돌아가 버렸다.

더 이상 평사에게는 지난날의 판을 압도해 들어가는 날카로운 공격력이나 화려했던 행마, 상대방으로 하여금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살기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평사가 녹슬었다, 그의 시대는 갔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평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내기바둑계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화제가 풍성했다. 솟아오르는 태양(太陽), 혹은 이미 중천에 떠 있는 해로 시라이시를 추켜세웠고 낙양(落陽)이라 하여 서산에 지는 해로 평사를 평가절하했다.

이제 평사는 더 이상 수많은 일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옛날의 그 조선 국수가 아니었다.

「추상, 이번에는 실수가 없어야 해. 지난번에도 당신이 잘못 훈수하는 바람에 다 이겨 논 바둑을 졌잖소!」

사내가 평사를 심하게 다그친다.

평사는 사내의 그러한 폭언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다. 전번 바둑은 평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평사의 훈수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저희들끼리 착오가 생겼다. 아무리 평사가 시들었다고는 하나 몇 수 아래 하급자들이 두는 바둑을 평사가 착각할 리는 없지 않은가.

사내가 바둑판 위에 40여 수 복기를 했다. 초반부터 대마가 서로 얽혀 있다. 평사는 다음 수순을 기계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내는 미심쩍은 듯 평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을 한다. 몇 번이나 의외의 변수를 검토한 사내가 밖으로 나간다.

평사의 훈수를 받은 사내는 곧장 승부가 벌어지고 있는 대국장으로 가서 자기 쪽 선수에게 평사의 수를 다시 교묘한 수법으로 전달한다. 그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속칭 ‘쿠사리 빵’이라는 사기바둑의 일종이었다.

1년 전 평사는 떠밀려 떠밀려 이곳 소도시 하치노헤(八戶)까지 내려왔다. 마쓰모토와 게이오가 평사를 버리고 떠난 뒤 히로시마 출신의 전주를 비롯해 또 다른 몇몇 전주들이 평사를 밀었으나 이미 평사의 바둑은 방향을 상실한 채 깊이를 알 수 없는 승부의 심해(深海)로 가라앉고 있었다.

평사는 자연스레 후방으로 밀려났고 여기저기 눈치나 보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한물 간 승부사들 틈에 끼여 뒷전을 맴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옛날의 명성이라도 있었기에 같이 붙어 다니며 밥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평사의 처지를 딱하게 보기도 했고 한편으론 맨날 술에 취해 있는 평사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자들도 있었다.

‘쯧, 쯧, 불쌍한 양반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저런 작자가 어떻게 바둑을 그리 잘 두었지.’

‘조센징이 바둑을 잘 두어 봐야 얼마나 두었겠어! 다 헛소문이지 !’

평사는 남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조롱이나 모멸의 말을 던져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저 뒷전을 기웃거리다가 누가 먹다 남은 술이나 주면 얻어먹고 밤이 늦어지면 사람들이 자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평사는 어느 날 문득 그곳을 떠나 지방 중소도시로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평사는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기원에서나 바둑을 두고 몇 푼이라도 생기면 그 돈으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기원이든 어디든 술에 취해 쓰러지면 그곳이 잠자리였다.

다행히 지방 소도시에서는 아직도 평사의 수가 통해 그나마 술값 정도는 대접을 받았다.

한참 동안 계속되던 평사의 기침이 멎는다. 휴지로 입을 닦는데 피가 묻어 나온다. 머리는 어지럽고 반상 위가 가물가물한다.

평사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를 쓴다.

먼 길을 걸어왔다. 평사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곳까지, 먼 곳까지 흘러 왔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사내가 들어왔다.

「수고했소, 추상. 내일 기원에서 봅시다.」

사내는 돈을 던져 주고 사라진다. 바둑판 위에 놓인 사내가 주고 간 지폐 몇 장을 평사는 떨리는 손으로 거머쥔다. 

***[100회 기념 번개 이벤트]***

소설 [승부]가 여러분의 성원 덕에 벌써 100회를 맞았습니다. 이에 조촐한 1백회 기념 깜짝 이벤트를 마련할까 합니다. 애초 계획이 없었으나 작가와 통화하던 중 그냥  지나치기에는 섭섭한 느낌이 들어 각중에 급히 벌여 봅니다. (그래서 번개 이벤트 ^^;;)

100회~107회까지 일주일간, 매회 연재물에 인상적이고 멋진, 톡톡 튀는 꼬릿글을 남겨주시는 다섯 분을 선별해 오로볼 4개와 포인트 10만점씩을 쏘겠습니다! 
당첨자는 다음날 연재물 말미에 발표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101회 꼬릿글 당첨자]

밥시기랑 ⇒  변함없이 출근도장을 찍어주시며 힘을 북돋아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 ^^ 물론 이벤트 기간에 매일 한분씩 '마음의 점'을 찍습니다.

ufo2002
절담 ⇒ 인상적인 꼬릿글

과붓집머슴
달빛산책 ⇒ 다분히 동정표(?) ^^ [승부]를 열렬히 사랑해 달라는 작가의 동정표 구걸입니다. ^^;; 

위 다섯 분께는 오로볼 4개와 사이버 포인트 10만점씩을 충전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