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평사의 기억으로 그의 나이가 40은 족히 넘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윤곽이 선명한 그의 얼굴 어디에도 잔주름 하나 없어 그의 정확한 나이를 짐작키 어려웠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그의 수려한 용모는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엄숙했으며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요한 눈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범접하기 힘든 고고함이 방 전체의 분위기를 착 가라앉게 했다.

방은 고서들로 가득 차 있어 묵은 서책 냄새가 은은히 배어 있었다. 햇볕이 반쯤 흘러드는 한쪽 벽면에는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여러 종류의 난(蘭)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문갑 위에는 쓰다 둔 지필묵과 화선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이미 대가의 풍모가 여실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설숙과 평사.

어려서는 노비와 상전의 신분으로 지배와 종속의 관계였으며 평사가 여목도장에 입문해서는 한 동문으로 성장하였다. 동문 시절, 평사가 뛰어난 발군의 기재로 여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면 설숙은 대나무와 같은 곧은 기상으로 여목이 가장 믿었던 제자였다.

언제나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존재했다. 스승 여목의 대통을 이어받고자 숙적으로 마주칠 때도 있었고 노비와 상전이라는 신분의 사슬에 묶여 서로를 경시하고 외면했다. 평사가 쫓겨난 후에는 한쪽은 번민으로 한쪽은 미움으로 세상을 살았고 스승이 죽은 후에도 그들의 심적 갈등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지난날의 모든 욕망과 열정마저도 그 세월 속에 묻어 버린 채 이제 두 사람은 오직 인간과 인간으로서 마주하여 서 있는 것이다.

「절을 올려라.」

침묵을 깨고 평사가 말했다.

동삼이 설숙에게 절을 올린다.

「나가 있거라.」

절을 올린 동삼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제 자식놈입니다.」

「…….」

「저 아이를 이곳에 남겨 두고자 찾아왔습니다.」

평사가 도장을 찾아온 자신의 뜻을 밝힌다.

설숙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 홀연히 나타나서 자식을 맡기겠다니. 설숙이 평사를 노려본다. 의문의 눈초리다. 또다시 침묵이 흐른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매듭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건 평사였다.

「전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평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누가 보더라도 평사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다.

「제 자식을 거두어 주십시오, 서방님.」

서방님…….

설숙은 서방님이란 말을 입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 본다.

어린 시절.

그의 아비에게 장터에 나가 화선지를 구해 오라 일렀다. 때마침 농번기라 하루 종일 일에 바빴던 그의 아비는 그만 깜빡 잊고 자신의 명을 실행하지 못했다. 화가 난 자신은 땔감으로 해 놓은 장작을 그의 아비 면상을 향해 던졌다.

반상의 신분이 엄격하던 시절이라 상전이 노비를 체벌하는 일은 흔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그때 평사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평사는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둡고 음울한 눈이었다. 상민에게서는 좀체로 볼 수 없는 당당한 눈빛이었다.

그날 이후 평사는 한 번도 자신을 서방님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고 평사가 열한 살 되던 해였다.

「저의 마지막 소청입니다…….」

평사의 간곡한 애원이다.

비록 천민의 자식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살아오면서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던 평사였다. 그런 그가 자식의 안일을 위해 평생을 애원(愛怨)으로 몸부림쳤던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러나 설숙은 끝내 가타부타 말이 없다. 평사는 설숙의 침묵을 승낙의 뜻으로 알고 절을 한 후 물러났다.

그날 밤.

평사는 동삼에게 당부를 했다.

「길은 험하다. 스승을 아비같이 생각하여라.」

새벽녘에 동삼이 눈을 떴을 때 평사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왜 추평사 선생께선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 설숙도장에 맡겼습니까?」

평사의 삶, 그 한 자락을 들추어 본 박 화백은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가슴을 짓누르는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눈을 감으면 거칠고 앙상한 몸으로 기침을 쿨럭이며 어린 자식을 데리고 길을 가는 평사와 동삼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때 추평사 선생의 건강은 이미 악화일로였네. 긴 세월 떠돌아다니며 술과 방탕한 생활로 몸을 망쳤고 거기다가 유배지의 생활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지. 그런 상태에서 어찌 자식의 앞날을 책임 질 수 있었겠나……. 그분은 자신의 삶이 바둑에서 시작해서 어차피 바둑으로 끝날 운명이란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 시작과 끝이 바둑인 그분이 동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아마 그분께서는 삶에 대한 마지막 종착지를 바둑으로 삼았고 동삼과 같이 돌아다녔을 거야. 바둑이야말로 그분에게는 온갖 영욕과 애증이 뒤섞인 생명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해봉처사의 말처럼 추평사 선생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광활한 승부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행마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다녔다.

불현듯이 박 화백은 자신이 왜소해짐을 느낀다.

자신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뇌했다면 추평사 선생은 삶 자체가 바둑이고 승부였다. 박 화백은 밀려드는 열패감을 어찌할 수가 없다.

「처사님, 도대체 사람 사는 게 무엇입니까?」

박 화백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두서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박 화백의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해봉처사는 묵상에 잠겨 있다.

그리고 잠시 후 해봉처사가 선문답하듯 중얼거렸다.

「들판의 잡초처럼 세월만 흘렀네…….」

박 화백의 가슴에 황량한 바람이 쓸고 지나간다. 

** [100회 기념 번개 이벤트]

소설 [승부]가 여러분의 성원 덕에 벌써 100회를 맞았습니다.

이에 조촐한 1백회 기념 깜짝 이벤트를 마련할까 합니다. 애초 계획이 없었으나 작가와 통화하던 중 그냥  지나치기에는 섭섭한 느낌이 들어 각중에 급히 벌여 봅니다. (그래서 번개 이벤트 ^^;;)

100회~107회까지 일주일간, 매회 연재물에 인상적이고 멋진, 톡톡 튀는 꼬릿글을 남겨주시는 다섯 분을 선별해 오로볼 4개와 포인트 10만점씩을 쏘겠습니다! 
당첨자는 다음날 연재물 말미에 발표하겠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