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는 바둑판만 응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긴장한 쪽은 엔도였다. 지나치게 긴장을 한 탓인지 엔도의 목줄기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6시 45분.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평사는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반상에 한 수를 착수했다. 히로시마에서 이곳 구마모토까지 달려온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좀더 세밀하게 수를 읽는다.

예전에 두 점으로 평사에게 한 번 진 적이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이번에는 두 점에 고미 다섯 개(덤 오목)를 요구했고 엔도가 시원스럽게 그 요구를 들어 주어 성사된 대국이었다.

‘원인이야 어떻든간에 네놈이 돈이 걸린 승부에서 추평사를 이긴 최초의 사내로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머리 속이 혼란한 와중에도 사내를 보면서 엔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별 수가 없다고 판단이 섰는지 사내가 흑돌 하나를 들어 반상 위에 착수했다.

6시 50분.

추평사…… 도대체 당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 시간이 없지 않은가. 이젠 내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없네…….

엔도는 절박한 심정으로 평사를 바라보았다.

평사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장고에 빠져 있었다. 표정만 보아서는 수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탈출할 방법을 모색하는지 그도 저도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6시 55분.

초조한 시간이 자꾸 자꾸 지나간다. 1분…… 또 1분…….

딱, 하는 착수 소리가 들리고 평사의 손이 반상에서 멀어졌다. 착수를 한 평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평사는 서랍장 위에 놓인 휴지 몇 장을 빼들고 밖으로 나간다.

순간적으로 엔도와 평사의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었을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엔도는 평사의 눈길이 자신의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마마쓰가 짜증스런 얼굴로 평사의 뒤를 다시 따라 나갔다. 엔도는 힐끗 괘종시계를 쳐다보았다.

6시 58분.

너무 촉박한 시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엔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에서 푸른 정맥이 돋아났다. 엔도가 무심코 히로시마에서 온 사내를 보니 그는 심각하게 팔짱을 끼고 반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엔도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놓은 채 눈을 감았다.

평사가 화장실 안 칸막이 문을 열려고 하자 이마마쓰가 평사를 막았다. 그리고 항상 하던 대로 자기가 먼저 문을 열고 혹시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이라도 있을까 하여 칸막이 안을 살펴본다. 그때가 이마마쓰의 시선이 평사에게서 떨어지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때다!

평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마마쓰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하고 이마마쓰의 머리가 벽에 부딪힌다. 그 틈을 타 평사는 이마마쓰의 복부를 발로 힘껏 내질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평사의 강력한 기습에 이마마쓰는 ‘헉’ 하며 바닥에 쓰러진다.

평사는 재빨리 바깥에서 문을 닫고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와 후문으로 통하는 길을 향해 뛰었다. 바로 그 순간 쓰러진 이마마쓰가 문을 박차고 나와 미친 듯이 평사가 달아난 쪽으로 뒤쫓아갔다.

후문이 눈앞에 나타나자 평사는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시계는 정각 7시를 넘기고 있었고 후문에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가 막 떠나려 하던 참이었다. 평사는 안도의 숨을 몰아 쉬며 승용차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묵직한 감촉이 목 뒤에 와 닿았다. 이마마쓰의 싸늘한 총구였다.

끝장이다…….

평사는 눈앞이 흐릿해져 왔다. 온 몸의 맥이 탁 풀렸다.

「건방진 조센징 새끼!」

이마마쓰가 평사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때였다.

「그를 풀어 주게.」

어느새 엔도가 그 자리에 나타나 있었다.

「부탁일세.」

엔도가 이마마쓰에게 간곡히 애원했다.

「안 됩니다.」

「이마마쓰!」

「…….」

이마마쓰가 평사를 곧장 끌고 갈 기세다. 엔도가 급히 이마마쓰를 잡았다.

「선택을 하게.」

이마마쓰가 엔도를 노려본다.

「그를 풀어 주고 평생 안락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를 죽일 것인가…….」

이마마쓰가 주춤한다.

「시간이 없어.」

……평사의 목덜미를 꽉 쥐고 있던 이마마쓰의 손이 서서히 풀린다.

자동차가 문이 열린 채 움직이고 있었다. 평사는 급히 차에 올라탔다. 차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쏜살같이 구마모토 역을 향해 사라졌다.

엔도가 이마마쓰를 데리고 다시 대국실로 돌아왔을 때 엔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도저히 살기 어렵게 보이던 평사의 중앙 곤마가 마지막 평사가 놓은 두 수에 의해 완생을 했고 오히려 흑돌 요석 일곱 점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전혀 생각도 못해 본 사활의 맥이었다. 워낙 난해하게 판이 뒤얽혀 끝을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눈에는 이미 승부가 뒤집어져 있었다.

히로시마 사내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계속 반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추평사. 역시 당신은 희대의 승부사다.’

엔도는 평사가 사라진 창 밖 거리를 내다본다.

사흘 후.

평사는 관부(關釜) 연락선 페리호에 몸을 싣고 있었다.

밤새 북으로 북으로 칠흑의 어둠을 뚫고 현해탄을 달린 연락선 주위로 새벽이 오고 있었다.

「부산이다!」

갑판에 나와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육지를 보며 소리쳤다.

평사는 갑판 난간을 거머쥐었다.

검푸른 파도 너머 어렴풋이 육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만 8년 하고도 4개월 만의 귀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