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장에는 차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평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자리엔 이마마쓰 중사가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기온이 떨어진 탓인지 차에서 내뿜는 허연 배기 가스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평사가 들어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소장은 창 밖에서 눈을 떼고 평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장실 탁자 위엔 위스키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영일동맹(英日同盟) 후 조금씩 일본으로 흘러 들어오는 고급 술이었다. 소장은 병마개를 따서 평사의 잔에 한잔 가득 부었다.

「마시게.」

소장의 말투가 여느 날과 다르게 들린다.

「오늘 구마모토에서 마지막 승부가 있네.」

「…….」

「더 이상 바둑은 둘 수 없을 거네.」

「…….」

「오늘 바둑을 두고…… 내일은 돌아오면 자넨 바로 제3숙사로 가야 하네.」

기어이…….

평사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동안 수차례 탈출의 기회를 보아 왔으나 감시가 심해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나마 그런 기회조차 노릴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마지막이라 내가 따라가야 하겠지만 나도 떠나야 할 입장이라…….」

소장은 문득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단 둘이서 술 한잔 한 적이 없더군.」

「…….」

「한잔 마시게.」

소장과 평사가 유리잔에 든 위스키를 한잔 쭉 들이켠다.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소장의 얼굴이 침울하다.

「……사할린이네.」

평사는 가만히 가슴 부근을 더듬었다. 최 조장의 아내에게 전해 주어야 할 편지봉투가 만져졌다.

‘미안하오, 최 조장.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할 것 같소.’

연병장에는 바람이 몹씨 불었다. 소장은 평사를 연병장까지 배웅했다.

「가끔 당신 생각이 날 거야.」

소장과 평사의 모습이 보이자 차가 빠른 속도로 후진해 왔다. 소장이 평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이별이군.」

소장의 손은 축축했다.

차를 타려는 평사를 소장이 다시 불렀다.

「추선생!」

평사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 소장이었다.

「잘 가시오.」

「바둑이 복잡하게 되었구만…….」

엔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바둑은 일견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중앙 대마가 곤마로 쫓기는 평사 쪽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앙 대마를 수습할 수만 있다면 계가로 어울리는 바둑이지만 중앙 대마의 수습은 여러 갈래로 얽혀 있어 쉽게 풀어질 형국이 아니었다.

저런 대승부사도 흔들릴 때가 있는가? 하긴 오늘을 넘기면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으니…….

사실 엔도는 평사가 밖으로 나올 때마다 탈출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오늘이 바둑을 두러 밖으로 나오는 마지막 기회이고 오늘을 넘기면 그 기회조차 영영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평사의 지금 심경이 어떻다는 걸 엔도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땡― 땡.

방 안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사의 얼굴이 착잡하다. 얼핏 보면 불리한 바둑 때문에 수읽기에 골몰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암담한 절망 때문이라고 엔도는 생각했다.

엔도는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일곱 시 정각까지 여관 후문에 차를 대기시켜 놓긴 했지만 평사로 하여금 그 차를 사용하게 하느냐 마느냐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괘종이 여섯 번 울리는 순간 엔도는 용단을 내렸다.

그래. 성공하든 실패하든 꼭 한 번만 도와 주자.

막상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그 동안 무겁게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일시에 해소되어 버렸다. 문제는 이마마쓰 중사였다. 평사를 감시하고 있는 이마마쓰를 어떻게 하든 따돌려야만 탈출이 가능했다. 오늘따라 이마마쓰는 더욱더 철저하게 평사 옆에 붙어 있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평사도 이마마쓰도 전혀 움직일 줄 몰랐다.

엔도는 초조했다.

운명의 신이 결국 그를 비껴 가고 마는 것인가?

새삼 자신의 뒤늦은 결정을 후회하며 시계를 보는 엔도의 눈에 평사가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다.

6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평사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이마마쓰도 곧바로 평사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들이 나가자 이내 엔도도 그들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서 평사가 손을 씻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잠깐만 좀 나가 있어 주게.」

언젠가처럼 엔도가 이마마쓰에게 둘만의 자리를 부탁했다. 이마마쓰가 무언가 제지하려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듯 아무 말 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엔도는 평사를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시간이 없어 간단히 요점만 말하겠네.」

느닷없는 엔도의 말에 평사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엔도는 품속에 미리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여관 후문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네. 7시 정각까지 그 차는 거기 있을 거야. 봉투 안에 약간의 돈과 차표가 들어 있네. 7시 20분 발 구마모토 역 출발이네. 종착지는 기타 큐슈. 이제부터 탈출하느냐 못 하느냐는 자네 몫일세.」

평사가 의아한 눈으로 엔도를 쳐다본다.

「함정이 아닐세. 생각해 보게. 내가 자네를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있는가?」

「…….」

「난 조선인을 싫어하네. 자네도 조선인이 아닌가. 난 자네를 살려 주는 게 아냐…… 자네의 바둑을 살려 주는 걸세.」

「…….」

「성공하거든 조선으로 돌아가게.」

말을 마친 엔도가 평사의 손을 잡았다.

「부디 잘 가시게…… 조선 국수.」

평사가 엔도를 바라본다.

평사가 이마마쓰의 감시아래 다시 대국실로 돌아온 시각은 6시 40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