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윤현석, 양건모 사범의싸인이 들어있는 우리집 가보 1호>

15 년전  나는  윤기현씨를 로스엔젤레스 에서 처음 만났다. 

1993년 7월 9일, 제 9기 박카스배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미주 한인 바둑애호가들을 위해 특별대국을 먼 이국땅에 펼친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타지에 살고있는 한인들을 위한 위문공연과도 비슷한 성격이었다.

나는 회사일도 다 집어치고 무조건 대국장에 나가 하루종일 대국을 지켜보았다.

그당시 이창호 6단과 윤현석 3단이 박카스배를 놓고 결승전을 벌였는데 결과는 이창호의 승리였다.  호텔 컨퍼런스룸에서 재미프로 차민수 사범이 해설을 해주었는데 생전 처음들어보는 바둑 생중계였다.   외지의 바둑인들로서는 정말 가슴설레이는 이벤트였다.

바둑이 길어져 참석한 모든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를 끝냈고, 대국을 마치고 뒤늦게 식사하러 온 창호는  이미 다식어버려 찬 부페음식을 한접시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지친 얼굴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악수라도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식사중이라 실례가 될것 같아 그근처에서 똥마련 강아지 처럼 빙빙 맴돌고있었다.   그때 윤기현씨가 웃으면서 오더니 인사를 했다.  창호와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더니 내손을 잡아 끌고 가더니 창호에게 소개 시키면서 악수를 하게 해주었다. (솔직히 말해 그분이 지금은 별세하신 양건모 사범님이 였는지 윤기현 씨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당시 나의 눈에는 오직 청년영웅 이창호만이 보일뿐 다른사람들은 별로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하게도 창호는 밥먹다 말고 배시시 일어나 손을 내밀고 악수를 했다.  (그런데 이건 악수라기 보다는 나혼자 창호 손을 잡았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손에 전혀 힘을 주지않고 손만 내민채 그대로 서있있었다.  억지로 어색한 악수를 끝내고  가져 간 두대국자의 사진이 있는  로스엔젤레스판 한국일보 신문에 이창호와 윤현석 사범의 싸인을 받을수 있었다.

이 싸인받은 사진은 몇안되는 나의 가보중 첫번째로 손꼽힌다.   이사를 수없이 다녀 웬만한것은 다 버리고, 잃어 버리기도 했지만 이사진만큼은 아직도 살아남아 내 책상 옆벽에 지금도 붙어있다.

다른 프로기사들과는 달리 사교적이고 싹싹한 윤기현씨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고 여지껏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을가지고  살아 왔다.   사실 지금도 그분에 대해 나쁜감정은 없다.  (물론 처음 바둑판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알고 나서는 좀 화가 나긴 했었지만 그분이 밉다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애기가들은 억대이 바둑판 사건이 이정도의 결말이 나왔으면 스스로 조용히 물러나 주길 바라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뭐 그정도 일가지고 그러냐 한번 실수한것인데 봐주고 넘어가라 는 분들도 계신것 같다.

일전에  몇번 윤씨 께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에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설명하는것이  좋을듯 하여 다시 펜을 들었다…(아니 자판기를 들었다)

그분의 앞으로 행방이  나에게 끼치는  이해득실은 전혀 없다.  그분이 한국기원에 계속 있다고 해서  나에게 손해가 되는것이 없고 또 물러난다고해서 나에게  득이되는것도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가 되어 불의를 물리치기위해 시위를 하고 글을 쓰고있는것도 아닌것 같다.  그리고 이사건의 당사자도 아니기에 무슨 용서를 한다거나 관용을 베풀수있는 입장에 있는것도 아니다.

그럼 도데체 뭐냐?

나도 내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왜 그분이 물러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거냐?

요즘 유창혁 사범님을 비롯한 젊은 층에서 개혁을 해보고자 동분서주 눈물을 뿌리며 뛰고 있는모습을 보면 마음이 메어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예전과 다른 뭔가 획기적인 새로운 바람이 불기시작한 한국기원을 보며 큰 기대감에 부풀어있는것도 사실이다.

요번에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한국기원의 중추적인 삼 사십대의  기사분들이 개혁의 뜻에 동참했다.  상금제 개혁을 하면 이분들에게는 좋을것이 별로없다.  다시말하면 피해만 보게되는 밑지는 장사이고 손해보는 개혁인것이다.

그래서 애기가의 한사람으로 나도 뭔가 조금이나마 이 개혁에 동참하는뜻으로 이런 글을 쓰고있는것이다.

윤기현씨가 그동안 한국바둑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신것에 대해 부인하는것은아니다.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이끄는데 직접혹은 간접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셨을 것이다.  또한 뛰어난 외교능력으로 새로운 기전 스폰서를 모셔오는등 음으로 양으로 바둑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인정해 드려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윤기현씨가 더이상 한국기원에 계시는것은 한국기원에 도움을 주지못하며 오히려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것같다.

물론 이것은 나의 사견이고 나의 생각이 틀린 생각일수도있다.  그러나 여지껏의 상황을 종합하고 추리해 본결과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더 늦기 전에 더이상 추하다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그동안 몸담아왔던 한국기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넓은 아량으로 지금 조용히 물러나시는 것이야말로 윤기현씨와 한국기원 둘다에게 윈 윈 (win – win) 의 최상전략이 아닐른지….

다만 어떻게 하면 좀더 멋있는 명목으로 근사하게 은퇴하실수 있도록 해드릴수 있을지...
이 돌대가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좋은 묘수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