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국면이었다. 반상에 착점된 수는 불과 열여섯 수. 흑의 입장에서 걸칠 수도 있고, 벌릴 수도 있으며, 갈라칠 수도 있고, 손 뺀 곳을 협공할 수도 있었다. 걸친다면 일자도 있고, 한 칸도 있으며, 눈 목자도 좋아 보였다. 협공의 방법도 다양했고, 갈라침의 자리도 커 보였으며, 벌리는 자리도 좁고 넓고의 차이가 있었다. 주변의 배석 관계가 워낙 미묘했기 때문에 모든 수가 다 최선의 수로 보였고 또 모든 것이 흡족치 않게도 보였다.

내실 한쪽에 앉아 있는 설숙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위처럼 꿈쩍도 안 했고 평소 부드러웠던 개원의 모습에선 예기가 흘렀다.

수십 분이 지난 후 도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해수가 앞으로 나와 한 수를 놓았다.

「날카로움은 있으나 조화가 오리무중이다!」

개원이 가차없이 해수의 수를 비판한다. 어지간하면 쑥스러워하거나 안색이 붉어질 법도 하건만 해수는 흔들림이 없다. 설숙은 해수를 보며 안도했다.

늘상 느껴 온 바지만 해수는 항상 너그러웠고 소나무처럼 높고 푸른 기상이 돋보였다. 비록 바둑에 대한 자질은 못 미치나 기상만을 놓고 볼 때 어쩌면 해수 저 아이야말로 스승 여목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지도 모른다.

설숙은 해수를 문하로 받아들이길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재주가 없어 보여 망설였으나 결과적으로 설숙의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해수는 스승 여목 밑에서 잠시 동문수학한 친구의 아들이었다. 해수의 아버지는 이상주의자였고 독립운동가였다. 여목 스승의 문하로 2년 가까이 바둑 공부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의 근기(根氣)는 바둑보다는 학문에 가까웠고 학문보다는 조국의 미래를 더 염려했다.

학문적인 기질로 유난히 설숙과 가까웠던 그가 5년 전 불쑥 설숙 앞에 나타났다. 그때 그가 데려온 아이가 해수였다.

「만주로 가야겠으이. 유일하게 내 발길을 붙잡고 있는 아이일세. 자네 문하로 거두어 주었으면 하네.」

그 후 해수의 맑은 눈과 인간 됨됨이, 그리고 학문적 기질은 이내 설숙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고, 큰 갈등 없이 제자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때부터 동문들 중 제일 연배인 해수는 문하생들의 맏형으로 동문들을 이끌어 나가는 주축이 되었다. 떠나 버린 아버지로부터 단 한 줄의 소식도 없어 마음의 고통이 적지 않을 터인데도 해수는 한 번도 그 고통을 겉으로 표현한 바 없었고 늘푸른 소나무처럼 청정했다.

최해수의 착수를 기점으로 유민재가 앞으로 나가 두 칸 벌리는 수를 착수한다. 통상적인 벌림보다 한 줄 더 나아간 자리다. 막상 착점을 하고 보니 그런 대로 한 수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개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욕심은 화를 자초하고 자만은 어리석음을 낳는다! 기분으로 두는 것은 수가 아니다! 자기도취일 뿐이다.」

유민재가 쑥스러워하며 물러난다.

「잔 수 몇 개 알았다고 해서 이치를 터득했다 할 수 없으며, 책 몇 권 본 것이 무어 그리 대수겠느냐!」

문하생들은 한 명씩 나아가 착수를 하고는 어김없이 그의 질타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명운과 동삼이었다. 명운이 힐끔 동삼을 바라본 후 앞으로 나간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명운이 귀에 눈목자를 걸치는 수를 놓는다.

이제까지 사정없이 비판과 질타를 퍼붓던 개원의 고개가 처음으로 다소곳해진다. 꾸지람을 각오하고 나갔던 명운은 개원의 질책이 없자 흡족한 심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동삼밖에 없었다. 동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둑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삼은 돌을 들어 담담하게 한 수를 놓았다.

그러나 동삼의 착점은 안이한 발상이라 하여 호된 비판을 받은 김재석과 동일한 지점이었다.

개원을 비롯한 동문들이 모두 놀란다.

「무슨 뜻이냐?」

개원이 동삼에게 물었다. 개원의 입장에선 동삼이 자신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수가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동삼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실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동삼을 바라보던 개원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이제까지 묵묵히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던 설숙이 입을 열었다.

「바둑은…….」

설숙이 나서자 개원이 뒤로 물러섰다. 문하생들의 시선이 모두 설숙에게 향했다.

「세상의 이치와 같은 것이다. 기리에 순응하여 운석을 적절히 하면 승부가 따를 것이나 기리를 망각하여 행마를 소홀히 하는 자에겐 승부가 없다.」

설숙의 말은 애매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동삼의 수를 비판한다고 볼 수도 있었고 그의 발상을 지지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바둑 전반에 걸친 본질을 언급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개원의 강의가 끝나고 문하생들간에 실전대국이 벌어졌다.

설숙은 늘 그렇듯이 명운과 민재의 대국을 멀리서 지켜 본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대국자의 표정이나 소비하는 시간을 보면 대강 유불리가 짐작이 가는 법이다. 오늘도 명운의 얼굴은 자신만만해 보였고 민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 옆에서 수읽기에 골몰해 있는 김재석의 미끈한 얼굴이 싱그럽다.

설숙은 여러 제자를 생각해 본다.

김재석의 경우는 특이했다. 제자로 입문하게 된 경위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재석의 집안에서 보면 그가 특이한 존재였다. 원래 그의 집안은 무반(武班) 출신 계급이었다. 큰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재석의 아버지는 상당히 개명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들을 소학교만 졸업하면 일본으로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소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재석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소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재석은 아버지와 같이 일본에 있는 형들을 만나러 갔다. 거기에서 재석은 처음으로 바둑을 만났고 바둑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번 바둑에 몰입된 재석은 헤어날 줄 몰랐다. 조선에 돌아온 재석은 학교 공부를 내팽개치고 장안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기예를 연마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재석의 부친은 불같이 노했다. 부친은 재석의 종아리를 치며 호되게 나무랐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왜놈들 세상이다. 어찌하여 왜놈들 세상이 되었느냐? 그들이 일찍이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조선이 쇄국이니 당파니 하고 싸울 때 그들은 명치유신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고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지금의 대제국을 만든 것이다. 그 힘의 근원은 그들이 받아들인 신교육이다. 그런데 지금 네 꼴이 뭐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바둑 때문에 공부를 내팽개치고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지 않느냐!」

재석이 눈물로 아버지에게 호소했다.

「아버지께서 일본을 배우라고 하셨잖아요?」

「일본과 바둑이 무슨 상관이냐? 바둑이 중국에서 생겨나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익히 아는 사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국가의 원로대신들까지 나서서 전 국민에게 바둑을 배우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에 금시초문인 재석의 아버지는 당황했다.

「네가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알았느냐?」

상해사변이 일어나던 해, 이누카이(犬養) 수상이 암살되고 마키노(牧野) 원로대신이 습격당했다. 이누카이는 고 혼인보 슈에이의 막역지우로서 일본기원의 명예 회원이었고 마키노는 권력의 핵심 세력으로서 당시 일본기원의 총재였다. 그들을 추모하는 추도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상이 험악하다. 이 혼탁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기리(碁理)를 터득하여 몸소 실행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만고(萬古)의 명세가(名世家)들이여! 바둑을 배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