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이 되던 해 한 학기를 마친 민수는 뚜렷한 이유 없이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내려와 버렸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여자 친구인 민혜(旼惠)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었고 두서 없는 대학 생활에 대한 회의가 그나마 이유라면 이유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쩌면 그 나이에 누구에게나 찾아 드는 존재의 상실감이나 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 혹은 순수와 진리를 향한 무모한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수는 내려와서 화필을 아예 던져 버리고 어머니의 시장일을 도왔다. 시기적으로 볼 때 휴학은 했으나 개인적으로라도 습작은 계속해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민수는 과감히 붓을 꺾고 태어나서 처음 세상과 주변의 논리를 거역했다.

동성대학교 앞 사거리에서 육교를 건너 시장 쪽으로 붙어 있는 동남(東南)기원에 민수가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쯤이었다. 그 대학에 다니는 친구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한 번 발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언제부턴가 민수는 거의 매일 그 기원으로 나갔다.

30평이 넘어 보이는 기원은 꽤 손님이 많은 편이었으며, 기원 안에 베니어판으로 룸을 만들어 놓아 한눈에 봐도 야통기원(24시간 영업하는 곳)으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그때 민수의 기력은 평범한 1급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민수는 1급에 가까워져 있었고, 대학에 들어와 바둑부에서 활동하며 대학패왕전 등 여러 대회에 참가하면서 기력은 더디지만 꾸준히 향상되어 갔다.

동남기원 장(張) 원장(院長)은 처음 며칠간 민수에게 기료를 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수의 기력이 의외로 높다는 것을 눈치 채고 특히 민수가 주로 하급자를 상대한 날은 기료 면제는 물론 밥도 한 그릇씩 사 주며 민수를 독려했다. 그리고 원장의 후원에 힘입어 기원 사범 비슷하게 된 게 민수가 기원에 나온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민수는 자연스레 독립군(기원에서 거의 살다시피하는 사람)에 속하게 되었고 독립군들과의 관계가 깊어져 함께 술자리 같은 데에 어울리는 일이 잦아졌다.

기원에서 독립군들의 역할은 크다. 독립군들이 어떻게 기원 분위기를 잡아 가느냐에 따라 그 기원의 성향이 결정된다.

독립군들은 매일 기원에 출퇴근하는 단골 손님과도 구별된다. 단골 손님은 표현 그대로 단골 손님에 불과하지만 독립군들은 기원을 기원으로 생각지 않고 집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단골 손님들과는 그 뜻이 다르다. 독립군들에게 있어 기원은 삶의 터전이요 호구지책의 수단이었다.

어느 기원이든 각 기원마다 독립군들이 우글우글했고 그 기원에서 독립군들은 기원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동남기원에서 거론되어야 할 독립군은 단연 송강(松江) 김송백(金松伯)과 마공(魔功) 김월출(金月出)이었다. 두 사람은 기원의 실세로서 독립군들을 주도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수가 근자에 독립군으로 편입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기원의 실세인 두 사람이 오랜 세월 서로가 앙숙지간이라는 점이었다.

몇 번의 술자리를 통해 느낀 것이지만 두 사람은 같은 독립군으로 어울리면서 사사건건 서로에게 시비를 걸었고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기 일쑤였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골은 깊었고 그로 인한 쌍방간의 적대 관계는 심화되어 다른 독립군의 입에까지 심심찮게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었다.

흔히 독립군들은 서로의 처지를 생각해 동료의식을 가지는 게 일반적인 경우인데 민수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관계는 특이하다면 특이했고 어떻게 보면 동남기원 자체가 일반 야통기원에 비해 예사롭지 못한 구석이 많았다.

성품이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을 닮았다 하여 송강으로 불리는 미남형의 김송백과 반상의 무법자로 별명이 마공인, 얼굴에 곰보자국이 가득한 김월출은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부터가 제각기 다른 포석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바둑이 1급이고, 30대 중 후반의 비슷한 연령과 김씨 성을 같이 쓰는 것 이외에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없었다. 기력이 같이 1급이라 하나 두 사람의 기풍은 판이했다. 호선 바둑에 가까울수록 송강이 마공보다 우위였고 석 점 이상 접바둑은 마공이 송강을 앞섰다.

예를 들어 호선, 선, 두 점까지는 송강이 판을 잘 짰으나 석 점이 넘어가면 마공의 마검(魔劍)이 빛을 발했다. 실로 마공의 하수 다루는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원래 떠돌이 독립군 시절 마공은 전문 방내기꾼이었다.

방내기는 한 판, 한 판, 계산하는 판내기 승부와는 달리 한 집, 한 집, 열 집 단위의 집으로 계산을 하다 보니 바둑의 형태가 정형에서 변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때 습득한 방내기 기술로 마공은 하수들에게 공포의 제왕으로 군림했으며, 마공 하면 하수들은 겁에 질려 무제한 방(만방(91집) 이상의 차이)을 연상했다. 그리고 마공은 당구를 쳐도 꼭 당구 방내기만 쳤다.

송강에게 다섯 점을 놓는 3급짜리 잔내기꾼이 한 명 있었다. 3급치고는 나름대로 돈독하게 두는 편이라 곧잘 송강을 애먹이곤 했다. 하수가 고수에게 보태 주지는 못할지언정 간간이 재미까지 봤으니 독립군들에게 그 3급은 눈엣가시였다.
그러다가 한번은 송강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공에게 같은 다섯 점으로 걸려 들었다. 바둑이 시작되자마자 마공이 대번에 방내기로 서너 판 크게 때려 버렸더니 앉은 자리에서 양빵을 맞고 생지갑을 빼앗긴 3급은 지금까지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울면서 기원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이 기원에서는 최고의 기량에 속했고 그런 관계로 두 사람의 대국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잖았으나 쌍방 승부를 꺼려했는지 지금까지 두 판을 두었는데 서로 한 판씩 주고받아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 세 번째 대국의 날은 기약이 없었다. 왜 두 사람이 대국을 꺼려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서로가 서로의 바둑을 시답잖게 보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공의 바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송강은 주저 없이,

「그 바둑이야 깡패 바둑이지. 정석도, 포석도 없는 바둑이 무슨 바둑이고!」

반대로 마공은 송강의 바둑을,

「동네 바둑도 한참 동네 바둑이지! 모양만 갖춘다고 다 바둑이가!」

하며 서로가 상대를 깎아 내리기에 바빴다.

두 사람은 성격도 달랐다. 송강이 매끄럽고 섬세한 반면에 마공은 거칠고 투박했다. 일류 대학 법대를 중퇴한 송강이 주도면밀하고 논리적이라면 학교라고는 거의 다녀 본 적이 없는 마공은 경험을 중시하는 실전파의 대가였다.

「아둔한 놈! 아는 것도 없는 놈이 고집만 세 가지고. 세상이 어디 고집으로 되던가. 순리를 모르는 놈은 결국 패가망신하는 기라.」

「짜잔한 놈! 지가 공부를 했으마 얼매나 했다꼬. 고상한 척하는 놈치고 제대로 되는 놈 못 봤다. 법학관가 다녔으마 어데 가서 사법서사라도 해묵지 지랄한다꼬 이런 데 와서 생양아치 맨치로 사나.」

매사에 이런 식으로 송강과 마공은 서로를 비난했고 틈만 보이면 상대를 씹었다. 보다 못해 독립군 중 제일 연장자인 노(老) 독립군 이인수(李仁秀) 영감이,

「이 사람들아, 젊은 사람들이 와 이카노!」

하면서 여러 번 중재에 나섰으나 중재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근간에 와서 두 사람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