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장은 시끌벅적했다. 일본 내기바둑 사상 최고의 승부사로 손꼽히는 시라이시의 바둑을 보기 위해 여러 도시에서 바둑인들과 그에 준하는 승부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라이시는 전주와 함께 미리 도착하여 시종일관 담소를 나누며 마치 승부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듯 여유 있는 모습이었고, 대국장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시라이시의 승리를 낙관한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 한물 간 삼류 승부사에 지나지 않는 중년의 평사에 비해 젊은 시라이시는 그 뛰어난 승부사적 기질과 무시무시한 기량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평자(評者)는 시라이시의 바둑을 오청원, 기다니 이상의 대기로 낙점을 주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시라이시의 승리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근간엔 시라이시가 암암리에 일본기원 소속 전문기사들을 수차례 격파하자 각계 명사들이 그의 후원회를 결성했다는 믿지 못할 소문과 그가 머잖아 정식으로 일본기원에 들어갈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는 흥청망청하는 다른 내기바둑꾼들과는 달리 자신의 몸과 바둑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알려져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욱더 신망을 받고 있었다.

대국장이 시라이시에 대한 여러 가지 찬사로 한창 시끄러울 때 대국 시간이 가까워 드디어 엔도가 평사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이 등장하자 소란스럽던 실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엔도에게 부축당하다시피해서 들어서는 평사의 모습은 몰골이 완전히 시들어 형상이 시체나 다를 바 없었다. 얼굴은 말라 비틀어져 양쪽 광대뼈가 두드러졌고 몸은 서리 맞은 갈대처럼 서걱거리기조차했다.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평사를 바라본다. 평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을 외면한 채 바둑판을 앞에 두고 시라이시와 마주 앉았다.

시라이시는 평사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저 사람이 수년 전 일본의 승부사들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조선의 기객 추평사란 말인가.

시라이시도 과거 평사에게 패배를 당한 사람들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비록 흘러간 솜씨라고는 하나 워낙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았기에 사실 시라이시는 내심 그와의 대국을 앞두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바둑판을 앞에 두고 산송장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라이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대국 개시가 되어 돌을 가리자 공교롭게도 시라이시의 흑번이었다.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덤이 없던 시대라 흑을 잡으면 결정적으로 유리한 법. 흑백의 결과에 따라 승부의 반 이상이 기울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대국장의 동요는 그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희대의 승부사 시라이시가 흑을 잡았으니 대국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엔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날 엔도는 시라이시의 전주를 만나 승부의 금액을 5천 원으로 합의를 봤다. 5천 원은 엔도가 고향에 있는 전답까지 모조리 팔아 마련한 전 재산이었다. 시라이시의 전주는 워낙 큰 액수에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엔도의 제의를 수락했다.

엔도는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걸 만큼 평사를 철저히 믿었고 평사가 기필코 이겨 주리라 확신했다. 평사의 백번이었으나 대국장의 사람들과는 달리 엔도는 평사가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엔도의 눈에는 평사가 승부에 있어서만은 제왕이요 절대적 군주였다.

하늘이 내린 기재였고 땅이 감탄한 승부사였다. 평사가 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호흡을 마친 후 시라이시의 첫 수가 마침내 우상귀 소목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대단한 기세였다. 돌 놓는 소리가 대국장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웅크리고 있던 평사의 상체가 서서히 펴진다.

평사의 눈이 반상을 비스듬히 쏘아 본다. 순간, 그 찌든 눈에서 살기 같은 것이 쏟아진다. 얼굴은 간 데 없고 눈만 살아 있는 기이한 형상이다.

엔도가 속으로 외친다.

저 눈…… 그래, 바로 저 눈이다! 저것이 추평사의 눈이다!

엔도의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 옛날의 평사의 눈을 보자 엔도의 가슴 밑바닥에서 오랫동안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친다. 엔도는 스스로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른다.

시라이시는 평사의 눈을 보고 일순간이지만 묘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반상 위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고 실내는 불현듯이 질식할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평사의 두 번째 수가 반상 위에 떨어졌을 때 엔도를 비롯한 대국장 안의 사람들이 평사의 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평사의 두 번째 수는 예상을 뒤엎고 시라이시가 놓은 소목에 곧바로 걸쳐 간 것이다.

대국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시라이시가 세 번째 수를 좌상귀 소목으로 가져가자 평사가 또다시 바로 걸쳐 간다.

아니, 이 자가!

시라이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두 귀를 비워 둔 채 평사의 돌을 눈목자로 협공한다. 10여 수가 지났건만 바둑은 벌써부터 어지럽다. 바둑은 초반부터 난타전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기세와 기세가 대립하고 살벌한 접전이 전개된다. 거액이 걸린 승부임에도 불구하고 평사와 시라이시는 일고의 흔들림이 없이 초강경 일변도로 맞선다. 평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공격으로 나섰고 시라이시는 뜻하지 않은 평사의 공세에 역공으로 반상을 들쑤신다.

바둑으로 전 생애를 불살라 버린 한 인간의 처절했던 삶과 고수의 반열에 오른 지 3년 만에 당대의 일인자로 군림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한 승부사가 뒤엉켜 반상을 휘황찬란하게 수놓는다.

창과 창이 부딪치고 검과 검이 소리를 질렀다.

용천검(龍天劍)과 비룡검(飛龍劍)이 있고, 일월도(日月刀)와 청룡도(靑龍刀)가 등장한다.

치고 달아나기를 수십 합, 찌르고 피하기를 또 수십 합. 권법(拳法)과 장법(掌法)이 춤을 추고 극(劇), 필(筆), 편(鞭:채찍), 궁(弓)이 천지에 뒤끓는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쟁터에 축지(縮地)와 비월(飛越)이 난무하고 도술(道術)과 선술(仙術)이 조화를 부린다.

창 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눈보라 치는 강호(江湖)로 돌아온 자가 있는가 하면, 오직 일도(一刀)에 목숨을 걸고 평생을 기다린 자도 있고, 봉술의 명인이요, 검의 달인이었으며 장풍과 경공(輕功)의 고수도 있다.

외로운 들판에서 적수공권(赤手空券)으로 싸우는 자도 있고, 숱한 비기(秘技)와 암기(暗技)가 횡행하는 넓은 세상에서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어 가는 비운의 검객들도 있었다.

초반부터 벌어진 평사와 시라이시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반상은 전역이 사지(死地)로 돌변하여 혼란과 비명의 아수라장이 된다.

병법에 달통한 손무(孫武)로부터 실전의 묘법(妙法)을 터득한 오자서(伍子胥)가 기세를 올리고 백병전과 단병접전의 명수 한신(韓信)이 배수(背水)의 진을 친다. 전략의 대가 장량(張良)이 천하를 호령하는가 하면 어느 틈에 공명(孔明)의 신출귀몰이 구름을 부르고 동남풍을 일으킨다.

평사는 진군한다. 외롭고 삭막한 세상에 태어나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전생의 업보(業報)처럼 등에 지고 평사는 진군한다. 마지막 남은 심혼(心魂)을 불사르며 평사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진군한다.

붉은 황토 먼지를 피워 올리며 필마단기로 적진 한가운데로 내닫는, 검은 갈기의 말 위에 전신(戰神)의 검은 수염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손에 들린 구십 두 근짜리 병기(兵器)가 썩은 짚단 자르듯 우수수 적들의 목을 베어 버린다.

말라 비틀어진 사내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태산과 같은 기개로 적장을 크게 꾸짖자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백만 대군이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었고, 그 속을 비집고 사내가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파고든다.

마침내 수장(首將)과 수장이 맞닥뜨려 반상(盤上)은 검은 구름과 회오리바람, 그리고 뇌성벽력이 한데 어우러져 점입가경의 기경(奇驚)스러운 광경을 연출한다. 어디선가 기세를 돋우는 북소리가 울린다. 비세에 몰릴세라 적장은 세상에 드러내 놓지 않던 혼자만의 비기를 대명천지 아래 노출시키고 검은 갑옷의 전사는 가문 대대로 내려온 천년의 절기(絶技)로 상대를 호령한다. 한 치만 삐긋해도 목숨이 달아나는 살벌한 접전이 수십 수백 합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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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승부]가 여러분의 성원 덕에 벌써 100회를 맞았습니다.
100회~107회까지 일주일간, 매회 연재물에 인상적이고 멋진, 톡톡 튀는 꼬릿글을 남겨주시는 다섯 분을 선별해 오로볼 4개와 포인트 10만점씩을 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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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참여 바랍니다.   

[103회 꼬릿글 당첨자]

폭풍999

살박골

覇天神經

한돌등대
우리집보리 
⇒ 두 분은 새로 찾아오신 독자이신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성원을 부탁드리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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