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이 방에 들어섰을 때 박용근(朴容謹) 사장은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박 사장은 동명관의 단골이었다. 마포에서 고려원(高麗院)이라는 한약 도매업을 하는 박 사장은 대단한 부자였다. 손이 크고 배포가 시원시원해 기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

박 사장은 미리 도착하여 혼자 바둑을 두고 있었다. 동명관에는 술자리 전에 투전이나 화투, 혹은 바둑을 두는 일이 항용 있어 왔기에 바둑판이 늘상 준비되어 있었다.

동삼은 박 사장이 시킨 궐련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박 사장은 동삼이 가져온 궐련 한 개피를 빼내 불을 붙인다. 박 사장이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놓으며 자책을 한다.

「이 바둑을 지다니!」

박 사장은 낮에 자신이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고 있었다. 한참 바둑판을 검토하던 박 사장이 판 위에 다시 한 수를 놓았다.

동삼은 반상 위에 놓인 돌들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바둑판에 시선이 갔다. 동삼이 보기에 넉 점 접바둑 같았는데 백의 초반 운영은 매끄러웠으나 중반에 들어서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백으로선 응수 타진을 해 본 후 손을 빼야 할 자리건만 그 수를 생략했고, 뒷수가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흑을 잡으려 했다. 아마도 정확한 복기가 아니어서 그러려니 추측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동삼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복기하는 것을 구경했다.

박 사장이 담배를 비벼 끄다가 동삼을 발견했다. 바둑판을 바라보는 동삼의 모습은 진지했다.

「바둑을 둘 줄 아느냐?」

박 사장이 동삼에게 물어 본다. 동삼이 박 사장을 쳐다본다.

「네 눈빛을 보니 바둑을 아는 것 같구나. 어떠냐, 심심한데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내 바둑 동무가 돼 줄 수 없겠나?」

「아닙니다.」

동삼이 사양을 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박 사장이 동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른이 이렇게 부탁을 하는데 그럼 쓰나.」

박 사장은 동삼을 강제로 바둑판 맞은편에 앉혔다.

「몇 점을 놓겠느냐? 아직 어리니까 한 여섯 점 정도 놓으면 되겠지?」

박 사장은 돌을 쓸어 담더니 제 손으로 여섯 개의 흑돌을 판 위에 올려 놓았다.

동삼은 잠자코 건네 주는 돌통을 받아 들었다. 박 사장이 흑돌에 날일자로 걸쳐 왔다.

박 사장은 지독한 싸움 바둑이었다. 또한 엄청난 속기였다. 동삼으로서야 박 사장 정도의 기력을 상대하는 데 장고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장고를 하게 놓아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허허, 참. 그렇게 해서 잡히는구나. 그러고 보니 여기 한 수가 비어 있는 걸 깜빡했네그려.」

무리하게 흑돌을 잡으려다 수상전에서 백대마가 몰살하자 박 사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되도록 동삼이 싸움을 피하면서 바둑을 두어 왔지만 결과적으로 백의 대마가 죽음으로써 만방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꽤 잘 두는구나. 보아 하니 여섯 점은 무리인 것 같고, 그럼 석 점만 놓고 두어 보자.」

얼굴이 약간 불그스레 달아오른 박 사장은 또다시 반상에 석 점을 자기 손으로 직접 놓았다. 묘한 습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상대방 치석을 자신의 손으로 놓는 것은 결례였다. 게다가 석 점 치석의 경우 상대의 우측 가까운 쪽을 비워 두는 법인데 엉뚱하게 동삼의 왼쪽 앞을 비워 놓았다. 다시 초속기로 진행된 바둑은 역시 백의 대패로 끝났다. 박 사장의 얼굴이 한층 벌겋게 달아올랐다.

「알고 보니 보통 바둑이 아니구나. 나하고 호선으로 두어도 밑질 게 없겠는데, 이번에는 맞두자.」

동삼이 재차 사양을 했으나 박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동삼은 그를 상대했다. 바둑이 중반을 넘어 결정적으로 불리해진 박 사장이 반상 위에서 허우적거릴 즈음 약속 시간이 되어 한 무리의 손님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동삼은 그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다음에 두시지요.」

그제서야 들어온 일행을 발견한 박 사장이 바둑판을 거두었다.

제 방으로 돌아온 동삼은 혼자서 쓰게 웃었다. 기력대로 두었다면 박 사장은 동삼이 거꾸로 여섯 점은 접고 두어야 할 상대였다.

동삼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벽지의 사방 연속무늬가 반듯반듯 그어진 바둑판으로 보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바둑이 성큼 다가왔다. 동삼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시각, 방 안은 시끌벅적했다. 박 사장이 망신당한 얘기를 숨김없이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만 해도 바둑 인구는 실로 일천했다. 그런 현실에서 동삼처럼 약관의 소년이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왜 그리 소란스러운 거요?」

가장 늦게 도착한 최대포가 들어서자마자 거들먹거린다. 최대포의 본명은 최성치(崔省致)로서 허풍이 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대포였는데 자꾸 대포로 불리다 보니 어느새 본명보다 최대포로 더 널리 알려진 40대 초반의 사내였다. 최대포는 박 사장이 혼자 복기한 바둑에서 백을 들고 두었던 상대였다. 윤곽이 둥글넓적하고 눈매가 약간 찢어져 보기에 따라 능글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최대포, 잘 왔소. 이 집에 있는 아이 중에 바둑 잘 두는 애가 하나 있어서 그 얘기를 하던 참이오.」

최대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여기 있는 계집들 중에 바둑 두는 애가 있단 말이오? 그 재미있구만.」

「계집이 아니오. 여기서 잔심부름하는 그 왜 또랑또랑하게 생긴 청년 있잖소.」

최대포가 한층 흥미 있는 표정으로 다가앉았다.

「아! 그애 말이지. 나도 한두 번 본 적 있지. 그래 얼마나 두기에 그렇게 난리들이오?」

「내가 처음에는 여섯 점을 접고 두었는데, 상대가 돼야지. 다음에는 석 점으로 마지막엔 호선으로 두었는데, 마침 이 친구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그나마 그 판도 어렵더라고.」

박 사장이 쑥스러워한다. 최대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요? 박 사장 바둑도 만만한 바둑이 아닌데 어디 내가 한번 두어 볼까?」

최대포가 내놓은 제안에 좌중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한다.

「그 좋은 생각이오. 어디 박 사장의 말만 듣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박 사장만 해도 중급에 속하는 실력으로 어깨에 힘깨나 들어가 있는 바둑이었다. 그런 박 사장이 맞바둑으로도 판이 어렵더라는 말을 최대포는 쉽사리 수긍할 수 없었다.

「그애를 좀 오라고 해라.」

박 사장이 옆 자리에 앉은 기생에게 일렀다. 영문을 몰라하던 기생이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