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개원은 정 진사를 만나 자식의 자질이 출중함을 알리고 설숙도장으로 보낼 것을 종용했다.

「뜻은 고맙소만 아이가 너무 어려서…….」

정 진사는 거절했다.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타관으로 보내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나절 만에 정 진사의 마음이 돌아섰다.

「듣자 하니 설숙도장에 입문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이다.」

「입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재주 있는 사람이 드물지요.」

「혹시라도 거절당해 아이의 마음에 상처나 주지 않을는지……. 애가 하도 졸라 승낙하긴 했으나…….」

정 진사가 말끝을 흐린다. 자식의 고집에 아버지가 진 것이다.

설숙은 처음부터 명운에게 호감이 갔다. 귀골스러운 용모와 진지한 대국 자세, 번득이는 재치와 넘치는 기백, 설숙은 명운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다. 설숙과 개원의 기대에 부응하듯 입문 후 명운의 기력은 일취월장하여 불과 2년 만에 고수의 반열에 들어섰고 지금은 스승에게 석 점으로도 버티어 낼 만큼 성장했다.

「풀었다!」

명운의 고함소리에 개원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디 놓아 봐.」

최해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운이 한 수를 놓았다. 그러나 명운의 착수는 이맥(異脈)이었다. 최해수가 정확하게 응수하자 명운은 몇 수 못 가 실패하고 물러났다.

그때였다. 개원은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빗자루를 든 채 우두커니 바둑판을 바라보던 일하는 소년이 난데없이 바둑판 앞으로 다가가더니 돌을 들어 한 수 놓았다.

기이하게도 소년은 정맥(正脈)을 짚고 있었다.

웬일인지 문제를 낸 최해수가 소년의 착수에 머뭇거린다. 정작 소년의 착수를 받아 준 사람은 명운이었다. 소년은 이미 정확한 수순을 보아 두었는지 스스럼없이 다음 수를 놓았다.

개원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소년의 정확한 수순은 거기까지였다. 먹여치지 않아야 할 자리를 먹여친 소년의 수는 교묘한 명운의 응수에 의해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바둑도 모르는 하수 주제에 이 자리가 어디라고 끼여 드나!」

명운이 소년에게 무안을 준다. 소년은 못 들은 척 비질을 시작한다.

「마당이나 깨끗이 쓸 일이지.」

심통이 난 명운이 한 번 더 쏘아 붙인다.

소년은 묵묵히 비질을 한다. 바람이 불어 소년이 모아 놓은 낙엽이 한 잎 두 잎 흩어진다.

개원이 문하생들 앞으로 다가선다. 개원을 발견한 최해수가 벌떡 일어선다.

「오셨습니까.」

문하생들이 한꺼번에 개원에게 인사를 한다. 비질을 하던 소년이 일손을 멈추고 목례를 한다. 개원이 소년을 똑바로 바라본다. 도장에 드나들면서 소년을 주의 깊게 보기는 처음이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치고는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소년의 눈매가 어딘지 낯이 익었다. 소년은 개원의 유장한 시선이 거북스러운지 서둘러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여기 일하는 애 말입니다.」

난에 물을 주고 있는 설숙에게 개원이 허두를 뗐다. 물기를 머금은 난 이파리가 한결 싱싱해졌다.

「당구 삼 년 폐풍월(堂狗 三年 吠風月)이라고 여기서는 일하는 애까지도 바둑을 알더군요.」

개원은 앞서 목격했던 자초지종을 설숙에게 전했다. 설숙이 손에 들고 있는 물조리개를 바닥에 놓는다.

「그 아이 아비가 추평사네.」

개원이 깜짝 놀란다.

「그래요?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진작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까?」

「…….」

개원은 소년의 눈매가 왜 낯이 익었는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소년의 눈매는 평사를 닮아 있었다. 한때는 여목 스승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던 평사를 떠올리며 개원은 소년에게 까닭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제 아버지와는 달리 바둑에 재질이 없어서 그냥 두는 것인가?

자질이 없으면 설숙은 그 누가 청을 해도 제자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연전에 의친왕의 소개장을 가지고 도장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무너진 왕조라지만 아직도 왕가에 대한 숭배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 그 신망과 영향력은 대단하던 때였다. 3·1운동이 일어난 것도 고종의 승하가 그 도화선이었고 6·10만세운동도 순종의 국장이 그 원인이었다.

설숙은 소년의 재(才)와 상(相)을 본 후 잘라 말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시오.」

거절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소년의 아비는 저으기 당황했다.

「의친왕께서 특별히 부탁한 아이외다.」

설숙이 아이의 아비를 타일렀다.

「이 아이의 바둑은 평생 낙(樂)에서 벗어나지 못할 바둑이오.」

아이의 아비는 크게 낙담하여 아이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개원은 설숙의 그런 모습을 수차례 보았다. 추평사의 아들도 같은 맥락에서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면 새삼스러울 바도 없으련만, 하지만…….

「아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동삼일세.」

「추평사 그분의 소식은 모르십니까?」

「애를 맡겨 놓고 사라진 후 소식이 없네.」

「그러고 보니 그분 소식을 들은 지도 오래 되었군요. 일본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설숙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왜 그분 자식을 그렇게 두는 겁니까? 보아 하니 바둑에 관심이 많은 듯한데.」

개원이 기어이 말을 끄집어낸다. 어쨌거나 추평사의 자식이 아닌가. 개원은 동삼에 대한 설숙의 생각이 자못 궁금하다.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개원이 보다 노골적으로 묻는다. 설숙은 끝내 대답이 없다. 머쓱해진 개원이 슬며시 화제를 돌린다.

「그건 그렇고, 정 노인(정 역관)을 한번 만나 보시지요. 일간 한번 들러 주십사 하더군요.」

개원이 느닷없이 정 노인을 거론하자 설숙은 의아해한다. 본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못 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평사와 어울려 내기바둑을 둔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로 설숙은 정 노인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몇 년 못 본 새 많이 쇠약해져 있더군요. 몸이 불편해 일본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개원이 슬쩍 정 노인의 근황을 밝힌다.

설숙은 난을 들여다본다. 오후의 투명한 햇살이 길게 방안을 비춘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풍란 하나가 막 철 늦은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