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은 끝없는 평원을 남쪽으로 내달리었다.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나의 정신은 이미 스틱스강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겪어야할 일이다. 비록 그 곳이 지옥일지라도. 

그것을 죽기 전에 미리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화롭게 보이던 바깥 풍경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달라져갔다. 

여기저기에 폭격을 받아 무너진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리우폴 시내에 들어갈 때쯤에는 주변에 보이는 건물들의 대부분이 망가져있었다.

시내는 거의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물들과 각종 무기들의 잔해가 쌓여있었다.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우크라이나 군의 은신처로 향했다.

태어나서 이처럼 심하게 포탄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다. 

넋이 완전히 나가는 듯싶었다. 

지하 은신처의 기둥들이 심하게 흔들리고 천장에서는 벗겨진 천장의 잔해들이 떨어져 내렸다. 

온 몸이 먼지로 하얗게 뒤덮였다. 

하루는 고사하고 한 시간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정말로 지옥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우크라이나 군과 러시아 사이의 야포전력의 차이를 극심하게 느꼈다. 

러시아군은 단거리 포는 물론이고 각종 장거리포와 전략폭격기에서 쏘아대는 미사일까지 가세하여 우크라이나 군 진지를 거의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에 비하여 우크라이나 군은 단거리 포로 겨우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이럴 때 K-9 같은 자주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원점 대응사격으로 적의 포진지를 통쾌하게 쳐부술 텐데.

우크라이나 군은 적에게 포위되어 점점 시내 중심부로 밀리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 의용군 한 명과 짝이 되어 우크라이나 군을 지원하였다. 

여기에는 미군 의용군들이 보이지 않았다. 워낙 위험하여 몸을 사린 모양이었다. 

때문에 재블린의 위력을 다시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대신 우크라이나 군은 구식인 RPG-7 대전차 로켓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재블린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성능이지만 그래도 우크라이나 군은 최선을 다하여 이 무기로 러시아의 탱크나 장갑차에 대응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보병들은 주로 엄호사격을 하고 나와 그리스 의용군은 저격용 총으로 러시아 보병들을 한 명 한 명 해치웠다.

밀리고 밀린 끝에 우리들은 최후의 보루인 아조우스탈 제철소로 진입하였다. 

제철소 앞에서 나는 그만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제철소는 마치 미래영화에 나오는 철의 도시의 폐허처럼 황폐하게 보였다. 

높고 녹슬고 복잡한 건물들이 나를 압도하였다. 

나는 고교 수학여행 때 포항제철을 견학한 적이 있다. 

그 때의 제철소는 웅장하지만 깨끗하고 세련되어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너무도 낡고 을씨년스러웠다. 

내부로 들어가서 나는 더욱 더 놀랐다. 

길은 마치 미로처럼 얽혀있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내부는 매우 컴컴하였다. 

정말로 하데스의 영역에 온 기분이었다. 앞으로 여기에서 지낼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던 제철소 내 생활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응이 되어갔다. 

이곳에는 민간인들도 수용되어있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정해진 구역만 출입하기 때문에 민간인들과의 접촉은 없었다. 

이곳에는 식당은 물론이고 병원, 학교까지 갖추어져있다고 하였다.

나와 함께 싸우는 그리스 용병은 한가할 때면 항상 책을 읽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모양이었다. 책의 표지가 닳아서 너덜너덜하였다.

우리들은 교대로 지상에 싸우러 나갔다. 

접근하는 적을 저격하기 위해서였다. 

적들은 제철소의 규모에 놀랐는지 아니면 우리들의 끈질긴 감투정신에 질렸는지 제철소에 진입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포 사격만 해댔다. 

처음에는 제철소를 보호할 양인지 제한적이었던 포 사격이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마치 제철소를 무너뜨리기도 할 것처럼 점점 더 치열해졌다.

보초근무를 하던 그리스 친구가 부상을 입었다. 

한 쪽 팔을 못 쓰게 되었다. 

그 친구를 대신하여 내가 야간 보초를 서게 되었다. 

전장인데도 달은 휘영청 밝았다. 

밝은 달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민간인 피난민들을 위하여 러시아 쪽에서 길을 터준다고 하였다. 

그리스 친구는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여기를 떠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지방에는 그리스계가 많이 거주하여 위장하는데 어려움은 없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동양인들은 별로 살고 있지 않았다. 

그리스 친구는 떠나기 전에 읽고 있던 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크세노폰이 쓴 아나바시스란 책이었다.

제철소내의 생활은 너무도 무료하였다. 

차라리 적이 제철소 안으로 진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료한 것 보다는 치열하게 서로 총을 쏘며 싸우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겠는가? 

계속 지루하게 지내다 보니 조국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손님들을 한 없이 기다리던 광경이 떠올랐다.

“이놈들아 제발 들어와라. 들어오란 말이다. 드르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