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옷매무새,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다. 눈빛이 샛별같이 맑다.

「애 엄니가 보내서 왔으라우. 1년 전인가. 쩌거 시장통에서…….」

「…….」

「직접 와야 도리겠으나 여인된 처지로 여의치 않다 함시로…… 어르신네 밑에 두고 싶어혔으라우.」

설숙이 소년에게 묻는다.

「이름이 뭐냐?」

「유민재이옵니다.」

말투가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다.

「바둑은 누구에게 배웠나?」

「죽암(竹巖) 선생님이십니다.」

죽암이라면 설숙도 모를 리 없다. 십수 년 전 선기재에 기거하던 우석 선생이 아끼던 제자였다. 우석이 야마다에게 패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문하생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세상의 문을 닫았을 때 죽암은 선기재 마당에서 부복한 채 사흘 밤 낮으로 비통하게 울면서 스승을 찾았다.

그러나 스승은 끝내 답이 없었고 죽암은 그 길로 야마다를 찾아가 스승의 복수를 위해 일전을 벌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보았지만 야마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죽암은 대국에서 패한 뒤 스승에게 사죄의 글을 장문으로 올리고 문하를 떠났다.

그 후 야마다는 평사에게 호되게 당한 후 일본으로 돌아갔고.

옛일을 연상했음일까. 설숙의 얼굴이 흐려진다.

「얼마나 수습했더냐?」

「1년 되었습니다.」

설숙의 얼굴이 한층 더 흐려진다. 시장통에서 그 일이 있은 직후부터 바둑을 배웠다니…… 우연치고는 공교롭다는 생각이 든다.

「몇 살이냐?」

「열두 살입니다.」

유민재는 열두 살치고 키가 좀 작은 편인 데다 뼈마디가 새 뼈처럼 가늘고 섬약했다.

설숙이 보기에 혹독한 수련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바둑과 지금의 이 아이는 부적합했다.

「바둑을 배우고 싶으냐?」

「예.」

「정히 바둑을 배우고 싶으면 죽암 선생에게 수습하도록 해라.」

설숙은 아이를 돌려보냈다.

1년이 지난 후 유민재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죽암 선생이 타계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 1년 동안 설숙은 서 여인을 자주 목격했다. 서 여인은 언제나 골목길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설숙이 오는 것을 보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서 여인의 뒷모습은 항상 쓸쓸해 보였다.

「죽암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민재가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돌아가거라.」

설숙이 엄하게 유민재를 노려본다. 유민재의 눈길이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파닥거린다.

「이유를 알고 싶으냐?」

「예.」

「네 앞날을 책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유민재는 어깨가 축 처져 돌아갔다.

며칠 후 설숙은 출타하다가 또다시 서 여인과 마주쳤다.

‘여느 때처럼 돌아서서 집으로 가겠지.’

설숙의 생각과는 달리 서 여인은 곧바로 설숙의 뒤를 따라왔다.

따라오는 서 여인의 발길이 무겁다.

처음 그분을 보고 난 뒤 여인은 그분이 지나다니는 골목길을 서성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길은 어느새 그쪽을 향하곤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나 여인은 하루라도 그분을 못 보면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어떤 날은 멀리서 도장만 바라보다 그냥 돌아서곤 했다.

‘내가 몹쓸 계집이다. 내가 몹쓸 계집이다.’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기나긴 동짓달 밤 여인은 이불을 끌어안고 밤새 울었다. 그렇게 밤이 가고 아침이 밝으면 여인은 다시 골목길을 서성거렸다. 어쩌다 그분과 마주치면 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 날 밤 꿈속에서 여인은 남편을 만나면 고개를 들지 못했다.

10월 초. 골목길 담벼락 가까이 들국화가 만발했다. 난데없이 설숙은 여인이 한 송이 들국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인이 앞에서 멈춘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안간힘을 쓰듯, 이마에 땀방울이 내비친다.

2년 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며 말을 더듬던 여인의 수줍은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여인은 설숙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큰길 쪽으로 앞서 간다. 설숙과 여인은 한 길 반은 족히 되는 사이를 두고 걷는다. 사박사박 걷는 여인의 치마에 들국화가 스친다. 설숙은 또다시 여인이 들국화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시인이 경영하는 큰길가에 있는 찻집으로 두 사람은 들어갔다. 문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꽤 알려진 찻집이었다. 아직 때 이른 시간이라 찻집 안은 한적했다.

설숙과 여인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생전 처음 남의 여자와 마주 앉은 설숙의 심기가 미편하다. 벽을 뚫고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다. 서 여인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친다. 땀방울이 가신 서 여인의 이마가 단아하다. 여인의 이마에 또다시 땀방울이 송송 돋아난다.

차가 탁자 위에 올려지기까지 서 여인은 세 번이나 이마의 땀을 훔쳤다.

「자식을 통해서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

「장래를 책임 질 수 없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온지?」

서 여인의 눈이 정통으로 설숙의 눈과 부딪친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듯, 서 여인은 꼼짝도 않고 설숙을 바라본다.

「기재는 있어 보이나 바둑에는 적합한 아이가 아니오.」

서 여인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다. 쪽을 쪄 올린 귀 밑으로 깨끗한 목덜미가 드러난다. 보송보송 솜털이 돋아난 목덜미를 보며 설숙이 쐐기를 박는다.

「매몰차다 생각 마시오.」

설숙이 몸을 일으키는데,

「잠깐만!」

신음하듯 서 여인이 낮게 소리친다. 여인의 눈자위가 어느새 흠뻑 젖어 있다.

「한 말씀만.」

「…….」

「지난 2년 동안 골목길에서…… 마주친 연유를 아시는지요?」

「…….」

「부정한 여자라 생각 마시오.」

끝내 서 여인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음성이 문풍지 떨리듯 바르르 떨린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를 보며 설숙은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일어나서 찻집을 나갔다. 두 사람 다 손도 대지 않은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설숙이 나간 찻집에서 서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사흘 후 서 여인은 대들보에 목을 맸다.

설숙은 서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연유를 아시는지요? 서 여인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했다. 땀이 흐르는 고운 이마를 몇 번이나 손수건으로 닦아 내던 여인.

삼우(三虞)가 끝나는 날. 설숙은 직접 서 여인의 집을 찾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추운 날이었다. 얼굴이 반쪽이 된 유민재를 데리고 설숙은 도장으로 돌아왔다.

바람 부는 골목길, 담벼락 밑에 만발했던 들국화는 어느새 시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