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기억 속을 헤매다가 민수는 겨우 기억의 묵은 책갈피 속에서 사내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장사를 하던 시장 근처 기원에서 사석(捨石)의 묘법을 일깨워 주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그 사범님이었다. 그때에 비해 그는 형편없이 쇠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수염까지 덥수룩이 나 있어 영락없는 폐인의 모습이었다. 민수가 한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승부의 뒷전에서 술이나 얻어먹는 신세였다. 그는 객꾼들 틈에 끼여 남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아 그는 아직까지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그가 일어났다. 민수와 그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민수의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다급히 고상남에게 작별을 고한 민수는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사범님.」

여관 골목을 막 벗어나는 그를 민수가 불러 세웠다.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그가 물끄러미 민수를 바라보았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저 박민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시장기원에서 사범님께 바둑을 배웠죠.」

시장기원 이야기를 하자 비로소 사범은 민수를 알아본다. 두 사람은 근처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그래, 지금도 그렇게 열심히 바둑을 두나?」

「실은 오늘 입단대회에서 졌습니다.」

민수의 대답에 사범의 입술이 비주룩이 올라간다. 비웃는 것도 같고 흥미 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패란 좋은 거지, 희망이 있으니까.」

민수는 그때 사범이 사기바둑으로 잡혀 들어감으로써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십니다.」

민수가 따라 놓은 술을 단숨에 비워 낸 그는 안주 대신 오뎅 국물을 한모금 마신다.

「그렇지도 못해. 마음은 있는데 옛날같이 몸이 따라 주질 않아. 하루만 밤을 새워도 몸이 시들시들해.」

포장마차의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이 더욱더 그를 늙고 수척하게 비춘다. 민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사범의 나이는 이제 40대 중반에서 후반 언저리였다. 빈 술잔에 자작으로 술을 따른 사범이 거푸 술잔을 비운다.

「자넨 술을 못하나?」

「아닙니다. 벌써 많이 마셨는걸요. 제 기억으론 옛날 그때만 해도 수 보시는 게 상당히 높았던 것 같아요.」

「천만에, 우린 이미 지나간 바둑이야.」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까다 선생도 40대가 전성기였습니다.」

「그 양반이야 난 사람이고, 우리 같은 졸바둑이 그런 바둑 흉내 내다간 그나마 뒷방 신세도 못해 먹지.」

뒷방 신세라는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그땐 공부를 어떻게 하셨어요?」

「공부랄게 있나 그냥 되는 대로지.」

「입단하실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 짓 해서 뭐할려고 그것도 하는 사람이 해야지.」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내뿜는 사범의 얼굴에서 상실한 자의 숙명  같은 것이 묻어난다. 민수는 화제를 바꾼다.

「시장기원 원장님은 한 번 만나 보셨나요?」

「그러고 보니 그 양반 못 본 지도 오래 됐군.」

「주로 서울에 계셨나 봐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만나지면 만나는 거고…….」

사범은 안주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술만 계속 비워 댄다.

「목적이 입단인가?」

민수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바둑이 좋아 바둑을 배웠고, 현재 그 바둑으로 살아가곤 있지만 바둑이 평생의 업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민수는 언제나 붓의 그림자가 자신을 짙게 드리우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렇다?」

「예.」

「바둑 그 자체가 목적이란 말인가?」

민수는 그 말에 대꾸를 않는다. 대답이 없는 걸 긍정으로 받아들이는지 사범의 입꼬리가 다시 비주룩이 올라간다.

「자넨 꽤 순진하군.」

마지막 남은 술을 홀짝 비운 사범이 일어서며 말한다.

「승부는 현실이지 이상이 아닐세.」

포장마차를 나오니 뿌우연 안개가 우욱우욱 밀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아스팔트 위로 안개를 몰고 지나갔다. 통금시간에 쫓긴 총알택시들이 흩어지는 안개를 뚫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멀리 가로등 불빛 사이로 도시의 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가 보겠습니다.」

민수가 말했다. 사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젊은 친구.」

민수가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돌을 죽이는 법은 배웠나?」

민수는 웃었다.

「조금요……사범님은요?」

그도 따라 웃었다.

「실은 아직 나도 잘 몰라.」

사범은 파란 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길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그것이 사범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범은 끝없는 도회지, 그 안개 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