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동삼씨는 그 길로 설숙도장으로 돌아갔습니까?」

「그렇다네.」

「당시 추동삼씨의 나이로 그런 감정 정리가 가능했을까요?」

해봉처사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린다.

「정리한다는 건 무리였겠지. 다만 정 노인께서 동삼에게 어떤 확신을 심어 주었던 것만은 분명하네.」

박 화백이 말을 돌린다.

「처사님. 승부와 정신적 수양은 연관이 있습니까?」

「물론일세.」

「그렇다면 어찌하여 20대에 명인이 생기고 50이 넘어가면 쇠퇴하는 겁니까? 바둑이 정신 수양과 관련이 있다면 오히려 경험과 연륜이 쌓일수록 강해져야 하질 않습니까?」

「내 생각은 좀 다르네. 나이가 들면 수읽기의 능력은 떨어지지만 기력 자체는 그리 쇠퇴하지 않는다고 보네. 정신적 수양이 그 점을 충분히 보충해 줄 수 있을 것이네. 다만 지금의 바둑은 시간 제한이 있는 터라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체력이 달리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나이 든 사람들 입장에선, 단 시간, 한정된 시간에 수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다는 것일세.
그러나 그건 바둑의 깊이와는 무관한 문젤세. 옛날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바둑으로 다시 환원된다면 우리는 60대의 명인도 볼 수 있을 것이네.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나이가 들수록 그만큼 승부심이 떨어진다는 점일세. 패기라 할까, 죽음이 가까워 오면 승부가 멀어지는 법이지.」

박 화백이 이의를 제기한다.

「그건 바둑의 깊이와는 다른 문제가 아닙니까?」

「아닐세. 전판에서 일어나는 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는 없는 법. 승부심이 떨어지면 원만한 타협을 추구하게 되고 모종의 변화를 피하게 되지. 승부에서 그건 중요한 변수라네.」

「결국 나이가 들수록 불리해진다는 말이 아닙니까?」

「변화한다고 능사는 아닐세. 변화란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네. 결국 그 답은 옛날로 돌아가서 얻을 수밖에 없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내친 김에 박 화백은 평소 자신이 가졌던 바둑에 대한 의문을 한꺼번에 털어놓는다.

「처사님이 보기엔 기재와 노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가정해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이 있네. 하나는 타고 태어난 천품과 그에 상응하는 노력으로 대성한 사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추평사 선생 같은 분일세.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비록 기재는 떨어지나 피 나는 노력으로 대성하고자 애쓰는 사람. 바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세.」

「추동삼씨는 어느 부류에 들어갑니까?」

「글쎄…….」

해봉처사가 그 물음에는 확답을 피한다.

「처사님께선 왜 바둑을 그만두고 불문에 드셨습니까?」

「본래 명인의 재목은 따로 있는 법.」

「혹시 전문기사의 길을 걸어 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어디 나처럼 초야에 묻힌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바둑을 알게 되면 될수록 박 화백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박 화백 자신도 한때는 입단하고자 애쓴 적이 있었다.

언제 패를 걸어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국하고 있는 상대의 손이 수없이 돌통 속을 왔다갔다 한다. 그렇다고 미세한 계가 바둑에서 먼저 가일수해서 보강할 수는 없다. 이 판을 이기면 희망이 있고 지면 끝장이다.

팻감은 어느 쪽이 많은가? 우상귀에 침입해 왔던 저 백돌이 끝내 화근이다.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팻감으로 사용하면…… 보고(寶庫)다. 패는 상대편을 당할 수 없다. 결국 양보하고 좌변에 다섯 점을 잘라먹는 것으로 교환하면 3집 손해다. 그래도 눈 터지는 계가다. 차라리 가일수를 할까? 아니다. 역 끝내기 넉 집, 여덟 집짜리가 더 크지 않은가.

민수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인다. 현재 4승 2패. 이 판을 지면 나머지 판을 다 이긴다 해도 8승 3패. 입단에서 실패하지만 이기면 희망이 있다. 9승 2패로 동률 재대국을 벌일 가능성도 있고, 최소한 시드에 남아 다음 입단대회에서 예선전의 치열한 소모전을 피할 수도 있다.

이 기원 저 기원을 떠돌며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민수는 흘러 다녔다. 그러나 민수의 바둑만은 그 당시 한창 물이 올라 있었다.

어느 날 밤 늦은 술자리에서 민수의 실력을 아깝게 여긴 영등포 신일기원 원장과 그 기원 사범이며 평소 친하게 지냈던 고상남의 강력한 권고로 민수는 입단대회의 문을 두드렸다.

날고 뛰는 수많은 강자들을 상대로 민수는 운이 따라 주었는지 본선에 오를 수 있었고, 막상 본선에 오르자 그는 입단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상대가 다시 패를 걸어 왔다. 초조한 상대의 손가락에서 돌들이 요란스레 비명을 질렀다. 민수가 먼저 패를 따 내자 상대는 노타임으로 우상귀의 팻감을 써 왔다. 귀는 살려 줄 수 없어 민수가 패를 받았고 상대는 패를 되 따냈다. 몇 번 패 싸움이 오고 간 후 민수가 좌변에 최후의 팻감을 썼다.

전라도 순천에서 소문 난 강자인 상대는 한참을 돌통 속의 돌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계산서가 나왔는지 상대는 패를 해소했다.

기분으로 승부가 기울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 후 바둑이 끝나고 계가를 하자 결과는 민수의 예상대로였다.

반면 일곱 집. 덤을 공제하고 한 집 반 패였다.

「박형!」

대회장을 나와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민수를 고상남이 불러 세웠다.

「또 실패라니…… 입단 한번 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니…….」

고상남도 본선에서 민수와 함께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사실 지금 프로가 된 기사들도 그렇게 말하잖아. 자신들도 다시 입단 과정을 되밟아 오라고 하면 과연 통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그만큼 전국에는 바늘구멍만한 입단대회를 통과하겠다고 와신상담 몰려드는 우리 같은 인간이 즐비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비록 아마추어지만 프로를 능가할 만한 숨은 인재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 생각해 봐. 몇 번씩 낙방하고도 또 달려드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아? 지독해, 지독해.」

고상남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좋은 바둑을 놓쳤어. 유리하길래 적당히 물러섰더니, 바보같이…… 그러고도 끝까지 남는 줄 알았어.」

고상남의 하소연에 민수는 대꾸할 의욕이 없었다.

「어디로 갈 거야?」

「…….」

「이왕 바둑은 진 거고, 술 한잔 살게 따라와. 돈이 생겼거든.」

「돈?」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기분 같아서는 어디 조용한 여관에라도 가서 며칠 죽은 듯이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민수는 거두절미하고 앞장 서서 가는 고상남의 뒤를 따라갔다.

평소 민수나 고상남의 입장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속칭 매미집에 들어가서 여자를 끼고 질탕하게 술을 마시며 들려 준 고상남의 얘기는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