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나와 처음 암자에 찾아왔을 때와는 달리 법고 스님은 동삼이 암자에서 지내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법고 스님은 무심하게 동삼을 대했다. 법고 스님의 그 무심한 시선은 어찌 보면 부처가 중생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는 눈길 같기도 했고, 아비 말을 거역하고 집을 떠났던 자식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을 때의 반갑기도 하고 노엽기도 한 복잡한 심경을 애써 숨기고자 하는 가장된 무심 같기도 했다.

「불이나 지펴라.」

법고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법당으로 올라갔다.

동삼은 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릴 때 더위를 피했던, 당시엔 그렇게나 커 보였던 회양목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다고 기억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법당 안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려 왔다.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승천이백오십인 구개시대아라한 중소지식 장로사리불 마하목건련 마하가섭 마하가전연 마하구치라 이바다 주리반타가 난타 아난타 나후라 마하겁빈나…….

어릴 적에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이 청아한 바람이 되어 산 주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염불소리는 동삼의 가슴에 타오르는 분노와 절망의 거센 불길을 어루만지며 그의 영혼에 스며들었다.

동삼은 하루 종일 불을 지피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동삼이 태우고 있는 것은 불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그의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모든 감정이 용광로 속에 녹아 이글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용광로를 달구는 힘은 동삼이 부정하고 싶은 자아(自我)였다. 요요히 넘실대는 불길의 춤사위를 보며 동삼은 시뻘겋게 달구어지는 쇳물 속에 자신의 온몸을 던져 넣었다.

법고는 동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삼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여름이 깊어 갔다. 절에서 불과 벗하며 살아가는 동삼은 어느덧 자신을 속박한 모든 번뇌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정 노인을 한번 만나 보자.

불현듯이 동삼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여름철 눅눅한 습기를 제거하려고 피워 올린 불이 아궁이 속에서 진홍의 거친 숨결을 토하는 것을 보며 동삼은 비로소 아버지의 삶이 궁금해졌다.

동삼은 법고 스님을 찾아갔다.

「내려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느냐?」

「…….」

「번뇌란 돌고 도는 것이다. 벗어나려 하면 갇히게 된다. 그저 편안하게 곁에 두고 살아라. 그리하면 마음이 수월해진다. 한마음 굳게 먹고 바둑 공부나 열심히 하여라. 그 마음이 차고 넘치면 나에게도 좀 나누어 주고…… 내 죽어 저승에서 너의 아비를 만나게 되면 바둑이나 한 수 배우게.」

법고 스님 방에는 탱화 한 폭이 걸려 있었다.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 앞에서 한 스님이 칼로 자신의 팔을 내려치는 그림이었다. 탱화 한켠에는 ‘설중단비(雪中斷臂)’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무상의 법을 얻기 위해 달마 스님 앞에서 제 팔을 잘라 버린 혜가승(慧可僧)의 그림이었다. 법을 얻고자 눈 덮인 산에서 제 팔을 자른 혜가승의 비장한 심경이 섬뜩하게 와 닿았다. 법고 스님 방에 들를 적마다 무심하게 보아 왔던 그림이었다.

「그만 내려가거라.」

동삼은 법고 스님에게 오체투지 절을 올렸다.

동삼은 그 길로 암자를 내려왔다. 녹음이 짙은 오솔길을 따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온 동삼은 그 사이 세상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틀 전 전쟁에서 패한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조선에는 여명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정 역관 집은 폐가나 다름없이 황폐했다. 단청은 세월 따라 잿빛으로 퇴색해 있었고 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원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인데다 요 몇 해 사이에 중풍까지 겹친 정 역관은 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수십 년 영화는 덧없이 흘렀고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외로운 말년을 근근히 연명해 나가고 있었다.

눈가죽이 처져서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녹슨 쇠창살 문을 열 듯 정 역관은 힘겹게 눈을 껌벅거렸다. 하마 심지가 타버려 꺼질 듯 꺼질 듯 가라앉은 회색빛 탁한 눈으로 정 역관은 동삼을 본다. 흐릿하던 초점이 차츰 한가운데로 모인다.

「눈은 참 아비를 닮았구나.」

정 역관은 감회에 젖는다.

「저의 아버님을 잘 아십니까?」

「추평사.」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비애가 지나간다.

「3년 전인가…… 설숙 선생에게 네 아비 기보를 전한 적이 있다. 보았느냐?」

「예.」

「그 기보가 바로 네 아비다.」

화두 같은 말이라 선뜻 감이 잡히질 않는다. 동삼의 등이 축축해진다.

「그 당시 일본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엔도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그때 정 역관은 자신을 망치게 하고 도망 간 김 집사가 일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시즈오카(靜岡)근처에 숨어 살던 김 집사는 이미 어디론가 달아난 뒤였다. 망연자실한 정 역관은 일본으로 건너온 김에 평사를 수소문했다. 그 과정에서 정 역관은 엔도 마쓰기지를 만났다.

엔도는 평사가 죽고 난 후 전주 생활을 청산하고 그때 승부에서 이긴 큰돈으로 동경에서 꽤 규모가 큰 화물 운송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정 역관이 평사를 거론하자 엔도는 대뜸 정 역관을 요리집으로 데려갔다.

술집에서 엔도가 한 장의 기보를 정 역관에게 건넸다.

「그는 죽었소. 이 기보가 그가 남긴 마지막 대국이오. 언젠가 조선인을 만나면 돌려 주기 위해 내가 기록하여 간직하고 있었소. 난 일본인이오. 하지만 당신네들에게 이 기보만은 돌려 주고 싶었소.」

설마 했던 평사의 죽음이 사실로 판명된다.

정 역관이 기보를 받아 들었다. 바람같이, 한 줌의 바람같이 그렇게 떠돌다 죽어 간 평사의 한 많은 일생이 정 노인의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엔도는 비감에 젖어 평사가 시신 같은 몰골로 피를 토하며 마지막 승부를 결했던 그 외롭고 처절했던 그날의 승부를 생생하게 정 역관에게 전달한다. 말하는 엔도의 눈에도 듣고 있는 정 역관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가득 고인다.

「그는 진정한 승부사였소. 그는 이제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의 승부정신만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외다.」

헤어질 때 엔도가 정 역관에게 2천 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내놓았다.

「이 돈은 그의 몫이오. 그가 승부에서 이긴 대가외다. 그는 이 돈을 나에게 돌려 주고 떠났소. 부디 받아 주시오.」

정 역관은 엔도의 돈을 거절한다.

「그럴 순 없소이다. 그것은 정녕 그 사람의 뜻이 아닐 것이오.」

그날 밤 숙소에서 정 역관은 태어나서 처음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셨다.

「무엇이 궁금하냐?」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버지를 기억하느냐?」

「예.」

정 역관은 불편한 몸을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다. 동삼은 침이 마르고 입술이 바짝 탄다.

「네 아버지는 여목 선생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