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방에 드신 손님들이 그쪽 좀 보잡니다.」

기생의 연통을 받은 옥화가 삐죽이 열린 방문 안으로 갸름한 얼굴을 반쯤 들이민 채 퉁명스럽게 말한다. 동삼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는지 알 수 있었다.

「빨리 가 보시오.」

옥화의 얼굴이 쏙 빠져 나간다. 사박사박 걸음소리가 멀어진다. 동삼과 단 둘이 마주칠 때면 옥화는 늘 퉁명스럽다. 때로는 어이가 없을 지경으로 고약스럽기까지 하다.

그저께 옥화는 술 취한 손님과 대판 싸움을 했다.

나이깨나 먹은 한량이 옥화의 미색에 홀려 술청에서 덮치려 하자 옥화는 사내의 면상에 술을 끼얹고 방을 뛰쳐 나왔다. 옥화는 평소에도 손님이 지나친 행동을 하면 서슴없이 욕설을 퍼부으리만큼 사나운 여자였다. 나이 열여섯에 기방에 팔려 온 그녀는 그 또래의 다른 기생들과는 달리 성질이 모가 나고 매사가 제멋대로여서 숙향이 골머리를 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날 동삼은 옥화가 가여웠다. 동삼은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옥화에게 내밀었다.

울고 있던 옥화가 얼른 눈물을 닦아 냈다.

「웬 물이오?」

「씻으시오.」

갑자기 옥화의 안색이 돌변했다. 옥화는 물 바가지를 홱 뿌리쳤다.

「치우시오! 날 동정하는 거요? 남정네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옥화는 벌떡 일어나더니 동삼을 쏘아 봤다.

「생각해 주는 척할 것 없소. 그쪽도 잘난 게 하나 없소.」

옥화는 쌀쌀맞게 제 방으로 돌아갔다.

옥화는 동삼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큰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교자상엔 이미 떡 벌어진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동명관 기생들이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동삼이 들어오자 최대포가 술잔을 훌쩍 비우고 윗목에 마련된 바둑판 앞으로 다가갔다. 최대포에 대해서 동삼은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손님들에 대해 이것저것 떠벌리기 좋아하는, 서른이 넘어 한물 간 영도라는 기생의 말을 빌리면,

「최대포 그 양반, 정말 희한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야.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놈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다녔대. 등 치고 간 빼먹는 솜씨는 또 어떻고. 내 이날 이때까지 뭇 잡놈 다 만나 봤지만 최대포만큼 말 잘하는 사람은 아직 보질 못했어. 사람 근본이란 게 알고 보면 조변석개, 도무지 모를 일이야.」

하면서 영도는 깔깔거렸다.

어쨌든 그의 주위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을 밑천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궁색하게는 살지 않는 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듣자 하니 바둑을 꽤 둔다고? 어디 나하고 한판 두어 보자.」

최대포가 동삼에게 자못 진지하게 제의했다. 동삼은 아무 말 없이 최대포의 건너편에 앉은 후 흑돌 통을 열고 우상귀 소목에 선수로 착수했다.

「이놈 봐라. 야, 이놈아! 그 사람은 내가 넉 점을 놓는 바둑이다.」

박 사장이 동삼을 나무랐다. 최대포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소, 됐소. 기백이 가상치 않소.」

대범한 척했지만 최대포는 내심 불쾌했다. 속으로 혼을 좀 내 주리라 마음 먹은 최대포는 그러나 10여 수가 넘어가자 오만함을 버리고 진지하게 대국에 임했고 50여 수 만에 돌을 거두었다.

「이제 보니 실로 대단한 고수구만. 내가 몇 점 붙여도 안 될 것 같은데…….」

최대포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동삼을 새로 본다.

「최대포가 지다니…… 소년 국수라는 겐가?」

「최대포가 몇 점 붙일 실력이라면 얼마나 잘 두는 거야? 이거 도무지 실감이 안 가는구만.」

최대포가 은근히 물었다.

「그냥 오다가다 배운 실력은 아니고 어디 전문적인 곳에서 정식 수련을 한 것 같은데…… 누구를 사사했나?」

동삼은 아무 대답 없이 판 위의 흑돌을 주워 담은 후 꾸벅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보니 백이 약간 답답하긴 해도 충분히 두어 볼 만하던데.」

손님 중에 누가 그렇게 묻자 입만 딱 벌리고 있던 박 사장이 면박을 주었다.

「자네는 봐도 몰라. 그러니까 맨날 하수 신세를 못 면하고 있지. 그나저나 대단한 친구야.」

박 사장이 감탄을 한다.

「저런 소년 고수를 여섯 점이나 접었으니…….」

박 사장은 기가 막혀 최대포를 빤히 쳐다본다. 보통 때 같으면 수다스럽고 말수가 많은 최대포가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꾸역꾸역 술만 마신다.

그 일이 있은 후 최대포는 뻔질나게 동명관을 들락거렸다. 오후 한가한 시간이면 불쑥 나타나서 동삼을 찾았고 밤이면 사람들을 끌고 와서 동삼과 바둑을 두며 매상을 올려 주기도 했다. 드물게는 동삼에게 옷을 선물하기도 하였고 술이 한잔 거나해지면 용돈으로 쓰라고 돈을 집어 주기도 했다.

동삼과의 치석은 석 점을 오르내렸는데 차츰 동삼은 최대포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꾸민 듯한 친절과 의식적으로 자기를 추켜세워 주는 게 싫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술에 취한 최대포가,

「너를 보면 고향에 두고 온 내 아들 생각이 난다. 형편이 되어 같이 살 수만 있으면 그애도 너처럼 고수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동삼은 마음을 바꾸었다. 그 때문일까. 최대포는 자주 동삼 앞에서 처량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최대포의 노래 솜씨는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감정이 살아 있었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되는, 구성지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한 최대포의 노랫가락엔, 최소한 어린 동삼이 듣기엔 일제의 압제에 속수무책 휘둘리어 고향을 떠난 모든 사람의 애환이 절절히 묻어 나왔다. 그 처량한 최대포의 노래를 들으며 동삼은 원인 모를 비감에 젖어 돌아가신 아버지 평사를 생각했다.

어느 날 최대포가 느닷없이 어떤 손님을 데리고 와서 동삼에게 바둑을 두어 보라고 했다. 최대포가 고수들간의 대국을 보고 싶어 특별히 모신 손님이란 말에 동삼은 아무 생각 없이 바둑을 두었다.
나이도 있고 해서 동삼이 흑을 쥐고 두었는데 비록 벅찬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상대도 아니어서 오랜만에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흠뻑 바둑에 몰입했다. 상대가 바둑이 불리해지자 지나치게 장고하는 바람에 약간 지루한 감은 있었지만 수읽기가 예리했고 행마의 모양새가 좋아 한 판으로 끝난 게 아쉬웠다.

그 손님과 바둑을 둔 이후로 최대포는 자주 다른 사람과의 대국을 부탁했다. 대국 상대로 한 명만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리를 지어 여러 사람을 끌고 왔다. 그런 날에는 술을 시켜도 기생들을 부르는 경우가 드물었고 바둑이 끝나면 썰물 빠지듯이 빠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뜻밖에 그가 데려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실력이어서 한 번은 백을 잡고 질 뻔한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종반에 상대가 실족하여 이기기는 했으나 신경이 곤두설 만큼 상대는 고수였다. 더구나 그 상대는 바둑 한 판 지는 걸 가지고 뭘 저렇게까지 낙담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좀 심하게 표현하면 온몸의 맥이 다 빠져서 돌아갔기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날 동삼은 멋진 승부를 보았다며 최대포로부터 20원이라는 거금을 용돈으로 받았다. 하지만 상대가 지고 난 후에 지나칠 정도로 허탈해하던 모습이 생각나 동삼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옥화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삼의 방을 옥화가 직접 찾아오는 건 근래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 바가지 사건 이후 동삼과 옥화의 사이는 더 소원해졌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옥화는 동삼을 외면했고, 간혹 숙향 어머니 방에서 동삼을 보면 애써 냉담했다.

「그쪽에게 할 말이 있어 왔소.」

술이 과했는지 옥화의 옷 매무새가 조금 흐트러져 있다.

「말하시오.」

「그 사람들 가까이하지 마시오.」

「왜 그러시오?」

「그쪽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모양인데, 그 사람들 질이 나쁜 부류들이오.」

옥화의 눈매가 야멸차다.

「행여 내가 그쪽이 고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오.」

도망치듯 옥화는 방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