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대수더냐! 그깟 하찮은 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도장을 나왔더란 말이냐!」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동삼을 대했던 법고는 동삼이 도장에서 나온 이유를 몇 마디 듣다 말고 버럭 화를 낸다.

「전 도장이 싫습니다, 스님.」

「이 미련한 중생아, 백정도 칼을 놓고 고개를 돌리면 부처라 했거늘, 설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냐!」

법고가 벽력같이 고함을 지른다. 법당 처마 끝에 앉아 있던 까치 몇 마리가 놀라 푸드득 날아간다.

「저를 절에 있게 해주십시오.」

「가당찮다. 절이 너같이 못난 놈 밥 먹여 주는 데냐!」

동삼이 풀이 죽는다.

「전 산이 좋습니다. 스님 곁에서 살고 싶습니다.」

법고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진다.

「중이라도 되겠다는 말이냐?」

「예.」

「중은 아무나 한다더냐. 돌아가거라.」

「스님!」

「바둑을 일러 왜 혁(奕)이라 하는 줄 아느냐? 왜 클 혁자를 쓰는 줄 아는가 말이다.」

「…….」

「너무 커서 아득하고 또 아득해 혁이라 쓰는 것이다. 속세의 온갖 잡사에 연연하고서야 결코 그 도리를 얻을 수 없느니. 얕은 재주로 그 끝에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써도 그건 헛되고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다.」

법고가 앉은 채로 돌아앉는다.

「가서 스승님께 용서를 빌고 하던 공부나 계속해라.」

화를 내다 말고 힘이 빠져 음성이 누그러진다.

생각해 보면 동삼의 생도 측은하기 그지없다. 아비 얼굴도 모르는 채 태어나, 술청에 나가는 어미는 자식 목숨 살리려 개가를 했고 한창 어미 좋아할 나이에 어미 먼저 보내고 오갈 데 없는 찬밥 신세가 되더니 아비라고 만나야 반 년 남짓 같이 지냈을 뿐 홀로 버려 두고 다시 훨훨 날아가 버려, 언제 어디서 객사했는지도 모르고…… 왜 그리 팔자가 드센지. 백정 나부랭이라도 좋으니 일가 친척이 하나 있나. 혈혈단신 기껏 찾아올 데라곤 술 처먹고 번민에 빠져 있는 땡땡이 중…….

법고는 명치 끝이 저릿저릿하다.

그러나 법고는 마음을 다잡는다. 신세에 대한 한은 스스로 풀어야지 누가 풀어 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측은하다고 받아 주면 아이의 장래를 망친다. 법고는 자꾸만 처지는 허리에 힘을 준다. 이윽고 허리가 꼿꼿하게 선다.

「돌아가거라, 어서!」

「스님!」

법고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입을 다물고 눈도 굳게 감은 채 오불관언 돌아앉아 있다.

법고 스님만은 언제든 자신을 받아 주리라, 막연히 그런 믿음을 가졌던 동삼은 참담한 심정으로 암자를 내려왔다. 사실 법고 스님은 동삼에게 있어 유일한 마음의 고향이었고, 아버지가 죽고 없는 지금 아버지와 같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동삼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도장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이었다.

동삼은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근 한 달여에 걸쳐 동삼이 당도한 곳은 조상 대대로 종살이를 했던 영남 동북쪽에 자리한 벽촌 봉화(奉化)였다. 동삼은 경성을 떠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먼 곳까지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버지의 흔적은 없었고 조부의 무덤 자리도 찾지 못했다.

「제우 면천해 갖고 허리 피고 살만 하디만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제. 사람들이 발견했실 직엔 시신이 얼음거치 써늘했고, 등거죽지에 진물이 흘러내릿시니…… 동네 인심이 우째 그랬는지…… 다 왜놈 세상 탓이라. 인심이 날로 각박해지니께…… 종놈 출신이 뫼자리라꼬 똑바른 기 하나 있나. 아들이라꼬 경성에서 내리오이 기가 막힐 노릇이제. 보는 사람도 딱하기 그지 없더마. 지게 송장을 해갖고 산으로 올라갔지마는 어디다 묻고 왔는지 누가 알끼고.」

앞이빨이 뭉텅 빠져 헛바람이 줄줄 새는 늙은이에게 들은 그 말이 전부였다.

마을 어귀에서 동삼은 한 아낙네를 봤다. 머리 위에 커다란 광주리를 인 아낙네는 두어 살 먹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이가 칭얼거리자 아낙네는 광주리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젖을 먹이며 아낙네는 연신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전형적인 촌부(村婦)인 아낙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저녁이면 곱게 화장을 하고 어디론가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곤 했다. 사르륵 사르륵 치맛단이 마루를 끄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눈을 감고 잠든 체했다. 소리 없이 방문이 열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어머니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분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한쪽 볼에 와 닿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입술. 그럴 때면 혼자서 지샌 그 밤의 어둡고 무서웠던 기억이 눈 녹듯 사라지고 이내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깨어 있을 때 어머니는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올 때마다 일부러 잠든 척을 했다.

막 세수를 끝낸 말간 어머니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볼은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 햇빛 아래 서면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낯선 집, 낯선 사람을 만나 이제부터 이 사람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당부하면서 어머니는 곱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일을 하다 말고 때때로 멍하니 일손을 놓고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에는 언제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대구까지 내려온 동삼은 장터에서 날품을 팔았다. 따뜻한 날엔 노숙을 했고 추워지면 아무 움막에나 기어들어 갔다. 다리 밑에서 거지들 틈에 섞이기도 했고 장터에서 거적때기 한 장 덮어쓰고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난했다. 못 먹어 부황이 든 얼굴은 황톳빛이었다. 아이들의 팔다리는 새다리처럼 가늘었고 비쩍 마른 몸에 배만 불룩했다.

「목심 붙어 있는 게 지옥이라.」

누구나 입버릇처럼 그렇게 뇌까렸다. 그러나 그 지옥을 스스로 떠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아귀같이 달려들었다.

그런 아귀지옥에 살면서도 동삼은 바둑을 멀리했다. 도장을 떠날 때 정명운에게 거의 선 치수에 가까웠으니 군 단위 국수쯤은 넘볼 수 있는 실력이었다. 바둑으로 입성을 해결하고자 마음 먹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동삼은 애써 바둑을 외면했다. 바둑을 생계 수단으로 보지 않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기보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경원해서였다. 가능하면 스승에게서 받은 것을 모두 버리고 싶었다.

동삼이 다시 경성으로 올라온 것은 반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