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길은 틈이 날 때마다 원고를 써나갔다. 글을 쓰는데 소질이 없었지만, 이 책은 다큐멘터리 요소가 많은 내용이었다. 사실관계를 원활하게 연결하고, 개인적인 감정이 투영되지 않도록 쓴다면 균형 잡힌 내용으로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한영운이 몇 차례 더 다녀갔다. 그가 이 책에 쏟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재길은 대필하는 마음으로 그의 뜻을 담아내고자 힘썼다. 그의 뜻을 헤아리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는 외줄타기 같은 작업이었지만 이 책이 갖고자 하는 의미를 잘 알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원고 작업이 끝나자 그는 한영운을 사무실에서 만났다.

“총사령관님께서 원고를 교정해주셨으면 해서 뵙자고 했습니다.”

표지에 ‘정축년 환란보고서’라고 쓰인 200여 쪽 분량의 원고를 받아든 그는 이 변호사에게 노고를 치하했다.

“제가 바쁘신 분께 많은 누를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작업을 하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글의 제목은 ‘환란’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축년 왜란보고서’라고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기획에 따라 일어난 경제적 침략이었고, 그만큼 일본이 전쟁으로 빼앗아간 노획물은 가늠조차 안 되는 금액이니까요.”

“글의 제목을 너무 거칠게 정하면 오히려 반감이 더 도드라져서 대중들이 감정에 휘둘릴 수 있는데, 잘 결정하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어떻게 시중에 내놓으실 계획이세요?”

“이 변호사님의 의중은 어떠신지요. 저는 일반 국민들께서도 모두 보실 수 있도록 시판을 했으면 합니다.”

“반향이 무척 클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진행하겠습니다.”

하시모토가 예전에 비해 한국에 출장을 오는 횟수가 서너 배 이상 늘었다. 그와 비례해서 일본에서 오는 제품의 주문도 늘었고 업무 진행속도도 한결 빨라졌다. 그렇지만 이는 업무를 보러 한국에 오는 출장만 계산된 횟수다. 그는 출장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잡히면 그 주의 주말에는 개인적인 용무로 한국에 다시 왔다. 최선애의 느낌에는 그가 일본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지방 어느 도시에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번은 꼭 만났고, 더러는 횟수가 두 번도 됐다.

‘정’이라는 것은 만남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쌓이는 것이다.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마음을 맞대고 살을 맞대게 된다. 그가 보내는 정성과 열정에 그녀도 어느덧 젖어들었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염려로 인해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을 했다. 자식이 없는 그가 애들에게 쏟는 마음이 각별함도 그녀를 그에게 빨리 젖어들게 만들었다.

“고모님 문병을 다녀온 지 꽤 됐네. 병원에 갑시다.”

주말에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하는 그를 그녀는 어이없어 했다. 바로 지난주에 다녀오고 이번 주 초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꽤 됐다’고 말하는 그가 내심 고맙기도 했지만.

최윤경은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못했다. 급성폐렴이 합병증으로 진행되어 병원에 있는 기간이 자꾸 길어졌다.

“오랜 기간 불편한 몸으로 살면서 혹사한 결과로 여러 증상이 한꺼번에 온 것입니다. 환자가 이제 마음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렸어요. 문진을 해보면 입원해 있으면서도 무척 편안한 상태를 보입니다. 이것이 나으려는 의지를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고 있어요.”

고모는 동생의 결혼식을 치르고 무척 좋아했었다. 이제 당신에게 주어진 일들은 모두 끝났다고 홀가분해 했다. 그 마음이 긴장을 풀어버린 것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아 명예와 실리를 모두 얻었고, 조카들에게 할 도리도 이제 다 마쳤으니 고모가 안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원하던 것들을 이루었는데, 이뤘으니 누려야 하는데 고모가 고생만 하며 산 세월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어서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조카들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그녀의 몸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하시모토의 잦은 출장은 신혼의 부부에게서 즐길 여유를 빼앗아 갔다. 회사에 일이 많아진 것이다. ‘회사의 발전이 반드시 나의 발전은 아니다’는 것을 아는 근로자들에게는 일이 많다는 것이 곧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평생에 다시없는 신혼기간이라는 생각에 최선미는 어떻게든 틈을 내보려 애를 쓰고 있는데 설민국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자기 요즘 바빠서 그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여. 우리에게 집중 좀 해줘.”

“응, 내가 그랬어?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모처럼 주말의 여유시간을 얻은 그들은 멀리 강릉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3월 중순의 이른 봄에 결혼을 한 덕분에 두 사람은 봄을 만끽 할 수 있었다. 봄날의 강릉은 다채로운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곳곳에 흐드러진 벚꽃은 강릉이어서인지 더욱 화려했고, 대관령 옛길의 고즈넉한 풍광은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더욱 새로웠다.

두 사람이 찾은 허난설헌 생가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곳은 한 순간에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더니, 수로 건너편으로 넘어가자 밀림 속으로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이 멋들어진 소나무와 물길과 꽃들로 치장한 속살을 내보여주었다. 거기에 더해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홍길동전의 마을임을 주장하는 조형물들까지 있어 강릉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동안 경포호 쪽으로만 구경을 다녔던 그들은 그 안쪽에 이런 비경이 숨겨져 있음에 또 다른 기쁨을 느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의 순간을 즐기는 그들이었지만,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힘든 미묘한 작은 틈이 그들 사이에 계속 남아있었다. 이곳에까지 여행을 와서 두 번째 신혼여행 같은 행복한 시간을 즐기는 와중에도, 불순물처럼 계속해서 느껴지는 미세한 균열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최선미는 알아챘다.

저녁을 마치고 커피가 유명한 강릉에서도 가장 예쁜 커피숍에 두 사람은 앉았다.

“이렇게 좋은 곳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서도 느끼게 되는, 아주 작은 껄끄러움이 나는 자꾸만 거슬려.”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느낌으로는 자기에게 어떤 고민이 있고, 그 고민은 내게 말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이라는 거야.”

그녀의 말을 듣고도 설민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앉아만 있다.

“지금의 침묵은 긍정인거지?”

그녀의 다짐에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잠시만 차에 다녀올게. 보여줄 것이 있어.”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벌떡 일어섰다.

“무섭게 왜 그래, 자기야.”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시 커피숍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책 한권이 들려있었다.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는 그 책을 말없이 내밀었다.

책을 받아 든 그녀는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녀도 알고 있는 책이었다.

[정축년 환란보고서]

뜻이 없는 사람들은 쓰잘때기 없는 책이라고 외면을 하고, 뜻이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이 갖는 의미로 인해, 분한 마음의 격정에 못 이겨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아 외면하는 책!

그 책이 다혈질인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다.

“자기도 이 책 알지?”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기가 힘들었다.

“이 책을 보는 당신의 얼굴 표정을 보니 알고 있는 게 맞는 거야. 저자가 우리가 아는 분이야. 그래서 이재길변호사님을 만났어.”

그는 이미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그동안 내게 말하지 않고 고민했던 이유가 이 책 때문이야?”

“변호사님이 말해 준 것은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이 다는 아니라는 거야. 일본이 또 한 차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지난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를 수탈했듯이, 임진년 왜란에 도자기를 훔쳐가고, 책을 훔쳐가고, 백성들을 잡아가 세계 노예시장에 팔아넘겼듯이, 이번에도 우리 경제를 거덜 냈어. 거기에 미국 등의 외부 세력까지 끌어들여서 우리나라를 아예 멸망시키려고 또다시 시도를 했다는 거야.”

그는 말을 이어가면서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손마저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