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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회] 8부 대륙에 불어닥친 피바람 (5)

2007-04 조회 3595추천 0 프린트｜스크랩

여목의 머리 속에 반면이 그려진다. 반면은 보다 넓게 확대되어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여목은 애써 마음속의 반면을 지우려 한다. 여목은 모든 사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몰입한다. 장좌불와한 상태에서 여목의 몸은 석고처럼 굳어 갔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숨소리를 죽여 가며 여목의 모습을 주시한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돌연 바깥에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한다. 바둑판 위에 섬광이 떨어지고 뇌성벽력이 울리며 여목의 얼굴 위로 전광(電光)이 명멸(明滅)한다. 여목의 형상은 귀신의 몰골이요 사람의 형상이 되기도 한다. 위지손은 갑작스런 천변(天變)에 기이한 징조를 느낀다. 그때, 여목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강렬한 눈이 반상을 뚫어지게 쏘아 본다. 일순 여목의 눈에서 푸른 광채〔靑光〕가 쏟아진다. 광채는 이내 여목의 청정한 기를 타고 반상 위로 부서진다. 석정의 손에 들려 있던 다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사람들은 놀라서 몸을 움츠린다. 그 순간 혼백을 담은 여목의 신검이 반상 위를 내리쳤다. 장내는 숨죽은 듯이 고요하다. 여목의 안광을 피해 반상을 내려다보던 위지손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신품(神品)이다！ 위지손이 소리를 지르며 반상 옆으로 쓰러진다. 여목의 눈에서 그제서야 광채가 사라졌다. 여목이 놓은 수는 형체가 없었다. 무형의 수〔無形之手〕. 사량분별이 불가하여 모양도, 빛깔도, 냄새도 없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생사를 초월한 천하의 수〔天下名手〕였다. 저녁이 지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위지손은 쓰러진 채 일어날 줄 몰랐다. 그것으로 그날 대국은 자연 봉수가 되었다. 대국은 쓰러진 위지손측의 요구에 의해 열흘 후로 연기되었다. 열흘간의 휴식은 석정에게 있어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석정으로서는 오랜만에 맞는 긴 휴식인 데다가 북경과 천진에서만 자란 그녀는 북경을 떠난 이래 처음 남방의 이국적인 풍물을 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양자강을 굽어보며 자연 속을 노닐었고, 해가 지면 주루에 들러 술을 마셨다. 여목은 양자강 기슭에 앉아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석정은 여목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둔 여목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였다. 그녀는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건곤일척의 승부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게 되었다. 대국을 이틀 앞둔 날 밤 한 젊은이가 여목을 찾아왔다. 「누군가?」 하고 여목이 묻자 청년은 다짜고짜 비수를 탁자 위에 꽂았다. 여목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야밤에 남의 숙소를 무단침입한 사람답지 않게 청년의 얼굴은 해맑았다. 청년은 천천히 탁자 위에 꽂아 둔 칼을 빼서 여목의 얼굴을 겨누고 일어섰다. 「내가 누군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여목, 당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지금 나라는 국치를 당해 왜놈의 총칼 아래 조선의 만백성이 신음하고 있거늘 당신은 바둑이나 두며 허송세월을 보내고만 있단 말인가?」 순간 여목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년이 겨눈 칼날이 여목의 안전에서 어른거린다. 「국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나라의 주권이 왜놈들에게 강탈당한 사실을 정녕 몰라서 묻는 말인가！」「…….」「지금 조선에는 이완용 등 만고의 대역적들이 나라를 팔아 백성들을 마구 짓밟고 있거늘 대원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고서야 바둑도 있는 게 아닌가.」 준엄한 문책이었다. 여목으로서는 바둑에 빠져 경술국치의 사실을 몰랐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명일 뿐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여목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며 청년이 말했다. 「내 비록 어머니를 조선 여인으로 둔 반쪽 조선인이지만 누구보다도 조선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오.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들을 응징하러 가기 전에 한가하게 바둑이나 두고 있는 당신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그만 돌아가겠소.」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은 돌아섰다. 여목이 청년을 불러 세웠다. 「청년의 이름은 무엇인가?」「이익환(李益丸)이라 하오.」 여목은 청년에게 품속에 있던 권총을 내주었다. 청년은 말없이 권총을 받아들고 사라졌다. 후에 여목은 그 청년의 소식을 들었다. 그 청년은 조선 땅으로 건너간 후 매국노 이완용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그 하수인 몇 명을 죽이는 데 그치고 왜경들에게 체포당해 총살되었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운 여목은 다음날 아침 일찍 위지손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른 방문에 놀라 불편한 몸으로 달려나온 위지손에게 여목은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대국을 끝마치지 못하고 떠나는 데 대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비록 한 이름 없는 기객이나 나에게 뼈와 살을 나눠 준 조국이 참혹한 지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상 더 이상 머뭇거림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이만 고국으로 돌아갈까 하오. 설령 내 가장 가까운 친인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하더라도 대국은 마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만백성이 왜놈의 총칼 앞에 놓인 이 시점에서 조국을 외면함은 조국에 대한 배신 행위일 것이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선생과의 못다 이룬 대국을 끝내는 날이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후일을 기약하며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 위지손은 봉투를 한 장 내밀었다. 일찍이 여목이 위지손에게 전달한 상관숭의 편지였다. 하루라도 조속한 귀국을 위해 배편을 이용하기로 한 여목은 상해로 향하는 길에 상관숭이 위지손에게 전한 편지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전략)…여목의 바둑은 정말 무섭소이다.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며 능소능대합니다. 특히 전투에 강하여 전투에 임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선비와 같은 풍모 속에 어디에서 그런 강한 전투력이 나올 수 있는 건지 불가사의하기만 합니다. 또한 전판을 읽어 내는 예리한 통찰력은 단연 백미(白眉)입니다. 그는 약점이 없는 바둑을 구사합니다. 다만 내가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이런 류의 바둑을 상대하는 데는 신수(新手)와 체력, 두 가지 길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것마저도 절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면을 공략하는 것보다는 승산이 있다고 보기에 삼가 무례를 무릅쓰고 이런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륙 바둑의 자존심이 선생의 두 어깨에 달려 있소이다…(후략)…. 여목은 조용히 그 편지를 불살랐다. 상관숭과 위지손의 얼굴이 피어 오르는 연기 속에 그려졌다가 천천히 하늘로 향해 올라갔다. 석정은 처음 여목에게 약속한 대로 미련 없이 여목을 전송하였다. 여느 여인처럼 눈물을 뿌리지도 않았고, 가지 말라고 옷깃을 부여잡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여목을 배웅하며 여목의 무사한 귀국을 기원하였다. 여목은 상해에서 어렵게 구한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자 석정은 떠나는 여목의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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