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머리고개를 내려가는 일은 올라갈 때 보다 훨씬 더 수월하였다.
거뜬거뜬 내려왔다.
논둑길을 지나고 용수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내의 징검다리를 쉽게 건넜다.
그러나 제법 넓은 내에 마주치자 고민거리가 생겼다.
징검다리가 있긴 있으나 쌀을 지고 건너기에는 너무 위태로웠다.
잘 못하면 몸만 아니라 쌀까지 물에 빠트릴 위험성이 있었다.
집신을 벗고 발싸개를 풀었다.
베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내에 발을 담갔다.
물이 상당히 차가웠다.
발에 싸 하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를 건너자 싸하는 감촉은 마비되고 더 건넜을 때는 오히려 후끈 후끈하는 열기가 발을 감쌌다.
발을 휘둘러서 물기를 털어내고 마른 잡풀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냇가에 수양버들의 가는 가지들이 바람을 맞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공암이 지척이었다.

공암 장터를 지나는데 아이들이 담벼락에 기대어 연을 날리고 있었다.
담벼락엔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사봉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연을 못 날리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나무들이 많아서 연이 걸리기 쉽고, 또 연줄이 끊어지면 연을 회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독골에 살 때는 친구들과 함께 연을 많이 날리었다.
마을 앞에 넓은 논이 펼쳐져 있어서 연이 걸릴 염려가 없고 또 연줄이 끊어져도 달려가서 논에 떨어진 연을 주워오면 그 뿐이었다.

공암에서는 내에 방죽을 쌓아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마차도 다닐 수 있게 해 놓았다.
방죽위에는 물이 그득히 고여 있고 그 잔잔한 물위에 옆의 절벽이 비추어져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절벽 위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단풍들이 붉게 걸려있어 더욱 경치를 돋보이게 하였다.

공암을 지나자 하신 상신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나타났다.
이 골짜기는 밖에서 언뜻 보면 막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짧은 골짜기가 병사봉의 산에 막혀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서면 길은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이어지고 좁은 골짜기를 벗어나면 눈앞에 제법 넓은 분지가 나타난다.
이 동네가 하신이고 계속 내를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면 상신 동네가 나오며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한 마디로 하신 상신 동네는 숨겨진 동네라 할 수 있었다.
막혀 보이는 짧은 입구 때문에 동네의 존재가 들어나지 않고 안은 제법 넓은 분지여서 밭은 물론이고 논도 꽤 되었다.
만약 난리가 난다면 이곳에 숨어서 충분히 몇 년간이고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하신으로 통하는 골짜기를 지나치자 병사 골의 자기소가 보였다.
자기소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마 그릇을 넣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순기의 어머니께서 일하시는 곳이었다.
순기는 자기소로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독골에 다녀온 다음날 순기는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
지게는 조그맣게 아동용으로 원배 형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순기의 몸에 딱 맞았다.
몸에 맞지 않는 큰 지게를 지게 되면 산을 오를 때는 별 지장이 없지만 산을 내려올 때에 지게 다리가 땅에 걸려 엎어지기 일쑤였다.

낮은 곳은 이미 나무꾼들이 벌초하다시피 나무를 해가서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했다.
촘촘한 가지 중에서 몇 개씩 골라서 낫으로 쳐냈다.
가지를 휘어지게 잡아 탄력을 주고 한 번에 싹둑 사선으로 쳐내는 것이 요령이었다.
요령이 없으면 힘은 힘대로 들고 잘 못하면 낫의 이가 빠질 염려도 있었다.
반 짐 정도 나무를 해 놓고 잠시 쉬었다.
눈앞에 눈에 쌓인 계룡의 연봉들이 위엄 있게 솟아올라 있었다.
전쟁터에 나선 대장군과 장수들이 줄줄이 서 있는 모습 같았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머지 반 짐을 채워 한 짐을 해 갖고 산을 내려왔다.
지팡이로 조심스럽게 땅을 짚으며 천천히 내려왔다.
만약 잘 못 삐끗해서 균형을 잃으면 다치지 않기 위해 지게에서 나뭇단을 털어내 버려야한다.
나뭇단이 굴러 굴러서 골짜기를 내려가면 흩어진 나무를 다시 주워서 새 짐을 쌓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봄이 되어 얼었던 대지가 풀리었다.
진달래가 온산에 붉게 피어났다.
자기소의 자기들을 공주 목으로 호송하는 날이 다가왔다.
호송대장은 원배 형이었다.
순기는 원배 형을 졸라 자기도 대려가 달라고 청을 하였다.
원배가 승낙하였다.
순기는 좋아서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공연히 폐가 안 될지 모르겠구나. 어른들 말을 잘 듣도록 하여라.”
걱정을 하면서도 어머니께서는 승낙을 해주셨다.
순기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동안 말로만 들었던 공주 목에 처음 가보는 것이었다.

나라가 뒤숭숭 할 때였다.
몽골군이 벌써 두 차례나 쳐들어와서 이미 도성을 강화도로 옮긴 뒤였다.
그러나 원배 형이 호송대장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도적들이 아니라 몽골군이 덤벼든다고 해도 원배 형은 쉽게 물리칠 거라고 순기는 생각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