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소가 가까워졌다.
길이 약간 오르막으로 바뀌면서 힘이 들었다.
보폭을 짧게 하면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왼쪽에 비룡소의 시퍼런 물이 순기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순기는 오른쪽 절벽에 붙어서 길을 올라갔다.
꼭대기에서 순기는 쌀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가장자리로 살살 다가가서 비룡소를 내려다보았다.
넓은 냇물이 비룡 소에서는 좁아지면서 소용돌이를 쳐댔다.
꼭 용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비룡소의 절벽 길을 내려가자 국실 동네가 순기를 반겼다.
대 여섯 채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네 앞의 논둑길을 걸었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국실 동네 뒷산 너머엔 대바위가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와 같이 구경을 갔었다.
어머니는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 순기는 대바위를 구경하였다.
순기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바위절벽이었다.
큰 바위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

어머니는 대바위 근처에서 가끔 나무도 하셨다.
그럴 때면 순기는 뒷동산 언덕길로 마중을 나갔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저쪽에서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오는 어머니를 보면 순기는 반가워서 얼른 뛰어가 어머니 품에 안기었다.

어머니가 해 오신 나뭇단은 부엌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불 끄느라고 바쁘고 순기는 잠에 취해 방안에 누워 있었다.
옆구리 쪽으로 불덩어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위급한 순간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순기를 구해내었다.
순기의 머리칼은 불에 그슬려서 곱슬머리가 되었다.
아침이 되자 다 타버리고 벽만 남은 집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순기는 가을 내내 어머니가 힘들게 쌓아 오신 나뭇단이 모두 타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국실 동네를 지나자 길은 버머리고개를 올라가는 오르막이 되었다.
순기는 호흡을 조절하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가장 힘든 곳이었다.
등허리에 땀이 배었다.
오르막 중간 중간에 돌무더기 성황당이 있었다.
순기는 성황당에 다다를 때마다 돌 한 개씩을 주워 성황당에 쌓았다.
성황당 곁에서 잠시 서서 쉬면서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휘돌아 흐르는 용수천, 두만리 동네가 내려다보였다.
한 참을 힘들게 올라간 뒤에야 고갯마루에 닿았다.
고갯마루에는 느티나무와 함께 가장 큰 성황당이 있었다.
순기는 돌을 주워 성황당에 쌓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드린 후 쌀자루를 내려놓고 땀을 식히었다.

버머리고개에서 바라본 앞과 뒤의 풍경은 확연히 달랐다.
뒤쪽은 아담하고 고만고만한 야산들이 수줍고 평화롭게 도란도란 거리고 있었고 앞쪽은 계룡의 준엄한 산자락이 서로들 위용을 뽐내며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산줄기가 뻗어내려 멈춘 곳에 공암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수십 채의 초가집이 모여 있고 기와집도 몇 채가 보였다.
공암은 5일장이 설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작년에 공암 장터에서 수박대회가 열렸었다.
순기는 아동부로 출전하였다.
결승까지 올라가 맛선 송곡에서 온 상대는 거의 어른이라고 할 만큼 덩치가 컸다.
순기의 공격이 적중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휘두르는 주먹 소리가 귀에 윙윙 울리었다.
한 대만 맞으면 끝장이었다.
요리조리 피하기는 했지만 순기도 지쳐갔다.
순기는 일부러 비틀 비틀거리면서 몸을 유연하게 유지했다.
자신감을 얻은 상대가 미소를 지으며 한 방에 끝내려고 돌진해왔다.
순간 순기가 있는 힘을 다하여 앞으로 뛰며 상대의 무릎을 밟고 그 탄력으로 상대의 턱에 무릎차기 한방을 날리었다.
큰 덩치가 고꾸라졌다.
 “야아 순기가 이겼다.”
응원 나온 사봉과 학봉의 마을사람들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순기는 상품으로 계란 한 줄을 받아서 자랑스럽게 가져다 어머니께 드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