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방식은 단판 연승식이었다.

「누구든 상관 없이 다 상대해 주겠다.」

큰소리를 치며 자신만만해하는 시마즈의 제안이었다.

승자가 패한 진영에서 내세운 주자를 계속해서 상대하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한쪽 편에서 단 한 명이 상대방 모두를 패배시킬 수도 있는 혹독한 방식이었다.

돌을 가리되 덤은 그 당시 한·일이 공동으로 채택하고 있던 4호 반 공제로 합의를 했다. 매 판마다 제한 시간은 없고 한 판이 끝나면 하루를 쉬고 다음날 계속 대국을 진행시키도록 했다.

「건방진 놈들! 내 그놈들의 콧대를 보기 좋게 눌러 청사에 이름을 남기리라!」

박갑수가 호기를 부린다. 장승표가 능글맞게 맞장구쳤다.

「형님까지 갈 게 뭐 있소. 내 손에서 줄초상이 나고 말 텐데, 형님은 푹 쉬시구려.」

「그래도 하나쯤은 남기게나.」

「거 하나 남겨서 뭐할려우」

「이 사람아 모처럼 나도 손맛은 봐야지.」

「아! 그럼 나 보고 봐 주고 두란 말이오!」

장승표가 눈알을 부라렸다. 그동안 장승표의 기력은 그 기재에 걸맞게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아니, 뭐 재미 삼아…….」

박갑수가 뒤로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박갑수와 장승표의 기고 만장한 행태를 보며 최해수는 염려스러웠다.

과연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최해수는 마음이 무거웠다. 믿을 사람은 정명운밖에 없었다.

명운이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정명운의 얼굴에도 수심의 빛이 역력했다.

이틀 후 일본에서 온 김재석 일행과 설숙도장의 문하생들간에 숙명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일본측의 선두주자는 생각대로 김재석이었고, 한국에서 맨 먼저 나선 사람은 약관의 김원준이었다.

출발은 좋았다. 돌을 가리자 김원준의 흑번이 나왔다. 4호 반의 덤에 대한 부담이 있긴 하나 흑을 쥐면 우선 마음이 안정되는 법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흑을 쥔 김원준이 일방적으로 밀렸다. 아직은 바둑이 설익은 김원준이어서 나름대로 버텨 보긴 했으나 기량 차이가 현저했다. 부담감 때문인지 김원준은 초반 포석부터 터무니없이 판을 짰고 중반이 지나서는 제풀에 밀려 대세가 기울어졌다.

김원준은 158수 만에 돌을 던졌다. 일본의 제1승.

김재석의 실력이 과거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향상돼 있었다. 안채에서 기보를 접한 설숙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김재석의 기량이 생각보다 출중했고, 김재석보다 수의 깊이가 높은 것이 분명한 나머지 두 사람을 생각하면 미상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 김재석과 장승표의 대국이 벌어졌다. 김재석 흑, 장승표 백.

바둑을 두러 가며 장승표는 김원준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하늘엔 천문(天門), 땅에는 지리(地理). 내가 뭐라 했더냐. 그렇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 했거늘!」

근자에 와서 장승표의 말투는 박갑수를 그대로 쏙 빼닮아 가고 있었다.

거드름을 잔뜩 피우며 대국에 임한 장승표는 실제 대국이 진행되자 맥을 추지 못했다. 타고난 기재와 노력으로 후일 전문기사가 되어 한때나마 이름을 날린 장승표. 전문기사 생활 6년 만에 병사한 형을 대신해 술도가를 하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고향 안동으로 낙향한 괴물기사.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장승표의 기량은 그들에 비해 일천했다.

포석 단계에서 한 번 실족한 장승표는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중반전 들어 몇 번의 승부수를 띄웠지만 김재석은 가차없이 장승표의 무리한 승부수를 응징했다. 스스로 자멸해 버린 장승표는 분루를 삼키며 돌을 던졌다. 일본 2승.

바둑을 끝내고 장승표가 박갑수에게 넌지시 충고했다.

「형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보기보단 꽤 둡디다.」

얼굴이 벌개진 장승표의 그 말에 박갑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 사람아, 내가 누군가. 일세를 풍미했던 동설 스승의 수제자요, 설숙 스승님이 가장 믿는 제자가 아닌가. 내 두 사람의 신기(神機)를 모조리 이어받았으니 하늘에 감읍하고 감읍할 뿐이네.」

박갑수가 댓돌 아래 가래침을 퇴 뱉으며 호언장담했다. 기실 박갑수의 기량은 탁월한 바 있었다. 동설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기풍에 명운도 혼이 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도장측 분위기는 침울했다. 어느 정도 예정된 흐름이었지만 막상 두 번이나 기선을 제압당한 아픔은 컸다.

그러나 본격적인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백을 쥔 박갑수는 초반부터 김재석을 압도해 나갔다. 정석을 무시하고 거푸 손을 빼 가며 발 빠른 포석을 전개한 그의 착수는 사뭇 눈부시기까지 했다. 이리저리 판을 들쑤시는 그의 현란한 행마에 당사자인 김재석뿐만 아니라 뒤에서 관전하는 시마즈나 아카기까지도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김재석이 곤혹스러워하자 박갑수가 껄걸 웃으며 평소 놀던 대로 좌중을 향해 한 법문을 한다.

「향기를 맡되 바람같이 하며! 소리를 듣기를 메아리와 같이 들으라! 우매한 것이 중생의  삶이거늘 아아! 시회 대중은 아시는가 무념무상이요 불생불멸이로다!」

「형님은 이미 한 소식 했소이다.」

장승표가 북장단까지 치자 박갑수는 더욱 신이 났다.

박갑수의 눈부신 행마는 중반전 초입부까지 계속되었다. 김재석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며 신중하게 응수했지만 신속한 그의 행마에 뒤처져 연신 허덕거렸다.

그러나 오전에 시작한 바둑이 정오를 넘어가면서 형세는 일거에 역전되어 버리고 말았다. 손바람을 일으키던 박갑수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습관처럼 나오는 덜컥수를 놓는 바람에 바둑은 급전직하했다. 기분이 좋아 별 생각 없이 중앙에 쌍립선 말을 배경으로 두 칸 뛴 수가 무리수였다. 일견 정수인 것 같았지만 주위의 배석이 미묘해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한 수였다. 박갑수가 뒤늦게 자신의 과수를 후회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중앙 백말의 허리가 잘린 박갑수는 침울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반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름대로 수습은 가능했지만 흑에게 제법 큰 실리를 헌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두터운 바둑에서 불리한 계가로 형세가 돌변하자 좀체로 볼 수 없던 박갑수의 장고가 시작되었다. 가로늦게 장고를 해 보지만 아무리 검토해 보아도 전세를 뒤집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눈앞에 가물거리는 바둑돌을 보며 박갑수는 마음속 깊이 자책을 한다.

십수 년 전 사고무친인 자신을 데려다가 당대의 명인(名人)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였던 스승 동설. 천성이 신중하지 못하여 박갑수는 늘 스승에게 질책을 받곤 했다. 다른 원생들이 1년을 들여다봐도 막막한 묘수풀이의 고전(古典) 기경(碁經) 발양론(發陽論)을 박갑수는 절치부심 한 달 만에 독파하고 기쁨에 겨워 스승에게 달려갔다. 허나 스승은 칭찬 대신 큰 한숨을 쉬었다.

「묘수는 오히려 독이 되나니, 빛이 겉으로 드러나면 상하는 법이니라. 빛은 마음속에 잠겨 있어야 한다. 운석(運石)에 기운을 불어넣지 마라. 너의 운석은 오히려 말라야 힘이 생기나니…….」

스승은 죽기 며칠 전 병석에 누워 자신에게 그 비슷한 가르침을 또 내렸다.

「넘치면 과하고 모자라면 부족하니 그 순리를 일러 행마라 한다. 그것만 극복하면 넌 천하제일의 명인이 된다. 부디 내 말을 명심하여라.」

닷새 후 스승은 세상을 떠났다.

박갑수는 생전 처음 후회를 한다.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스승의 가르침이 이제 와서 가슴을 친다.

그때 스승의 말을 좀더 귀담아 들었으면…… 늘 자신을 걱정하던 스승의 심경을 조금만 더 헤아렸으면…….

박갑수의 가슴이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미어진다.

종반에 들어 다시 박갑수의 묘수가 연달아 터졌다. 하지만 침착한 김재석의 응수에 승부는 불변이었다. 계가를 해 보니 반면 8집, 4호 반 공제하고 3집 반 흑승이었다. 일본 3승.

박갑수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게 내 만만치 않으니까 조심하라 했잖소. 큰소리 치더니 꼴 좋소. 아, 세상에 그걸 옆도 안 돌아보고 두 칸씩이나 뛰는 사람이 어디 있소! 초짜도 아니고…….」

장승표가 박갑수의 속을 질렀다. 보통 때 같으면 맞고함 치고 난리가 나련만 박갑수는 말없이 신발을 신고 내려간다. 장승표가 그런 박갑수의 모습이 측은한지 뒤따라 내려간다.

「형님! 바둑 한 판인데 왜 이러시오! 형님답잖게!」

박갑수는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장승표가 계속 따라가며 형님! 형님!을 연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