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면은 엎치락뒤치락 난전으로 빠져 들었다. 한 수 한 수마다 승부의 살기가 감돈다. 유리하던 동삼의 바둑이 종반에 접어들어 칼날 같은 설숙의 예리한 수읽기에 의해 추월을 당한다. 한두 집 부족했던 동삼이 기어이 무리한 승부수를 던져 바둑은 불계로 끝이 났다.

「아비는 빨라서 화를 자초하더니 아들은 둔해서 문제구나…….」

그로부터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 갔다.

한번은 밥상 위에 흰 쌀밥이 올라왔다.

「웬 이밥이냐?」

「아랫마을 면장에게 틈 나는 대로 한두 시간씩 바둑을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설숙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밥상을 썩 물려라!」

동삼은 스승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기바둑을 둔 것도 아니고, 남의 재산을 탐한 것도 아니었다. 배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고 정정당당한 대가를 받은 것이다. 날마다 스승의 밥상에 보리밥 혹은 감자를 이긴 멀건 죽을 올릴 때마다 스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죄스러웠다. 그나마도 없어서 자신은 굶기가 일쑤였다.

전쟁 끝이라 온 국민이 기아에 허덕이는 지금이 아닌가. 외진 곳이라서 모든 것이 부족한 이곳에서 날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살고 봐야 할 일이 아닌가.

동삼은 납득할 수 없는 스승의 그 대쪽 같은 성정에 반발심이 일어났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마침내 동삼과 설숙 스승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겨울이 왔다. 봉화에 내려온 지도 만 3년이 지났다. 휴전이 되고 3개월이 흐른 후였다.

봉화로 내려올 당시가 겨울 초입이었으니 네 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겨울은 동삼이 바둑 공부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었다. 농한기여서 일거리도 드물고 봄부터 가을까지 피땀 흘려 마련한 양식과 땔감이 떨어지는 불상사만 없다면 하루 종일 바둑에 매진할 수 있었다. 고가에 또 낯선 손님이 찾아 들었다.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찾아온 손님은 이마가 넓게 벗겨져 중년인지 장년인지 나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여기 설숙 선생이 계신다길래 찾아왔소만…… 이 집이 맞소?」

「누구십니까?」

사내는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신발에 묻은 흙덩이를 털어 내며 성큼 마당 안으로 들어선다.

「찾긴 바로 찾은 모양이구만. 나는 경주에 사는 이동춘이란 사람이오. 설숙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소.」

동삼이 머뭇거리자 이동춘이 싱긋이 미소 짓는다.

「어렵게 먼 길을 찾아온 사람이니 기별부터 해주시오.」

이동춘(李東春)은 영남 출신 방랑기객으로 그 당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설숙의 방문이 활짝 열린다.

「들어오시게.」

이동춘은 거 봐라는 듯이 동삼을 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선생님을 한번 뵙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이동춘이 깍듯하게 절을 올린다. 동삼이 막 자리를 뜨는데 설숙이 동삼을 부른다.

「들어오너라.」

이동춘의 앞에는 어느새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설숙은 동삼에게 손가락으로 이동춘이 앉아 있는 맞은편을 가리킨다.

「먼 길을 오신 분이니 네가 손님을 맞도록 해라.」

이동춘이 실망을 한다. 설숙이 조용히 이른다.

「수를 나누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불청객인 입장에서 가타부타 따지기가 곤란한 이동춘은 어쩔 수 없이 동삼과 대국을 한다.

호기방장하게 찾아온 만큼 이동춘의 기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창 바둑에 물이 오른 동삼에겐 역부족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창나게 밀린 채 허망하게 바둑이 끝났다. 설마 하다가 된통 당한 이동춘이,

「한 판만 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동삼에게 사정을 한다. 먼 길을 찾아온 사람에 대한 예우로 동삼은 그의 청을 받아들인다.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겠네.」

돌연 설숙이 냉담하게 대국을 중지시킨다. 설숙의 거절에 이동춘이 아쉬워한다.

이동춘은 일어나서 다시 설숙에게 절을 하고 물러난다.

이동춘이 물러나자 설숙이 동삼에게 승부의 남용을 경계시킨다.

「승부를 탐하지 마라.」

‘승부를 탐하지 말라니?’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에 동삼이 앞뒤 없이 대꾸한다.

「승부를 탐한 적도 없을 뿐더러 설령 승부를 탐했다고 해도 바둑은 어차피 승부가 갈라지질 않습니까.」

동삼이 매몰차게 반박했고 그 반박은 설숙의 가르침에 명백히 위배되는 말이었다. 설숙은 매서운 눈길로 동삼을 노려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바둑에 있어 피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소위 탐(貪), 진(瞋), 치(痴)이거늘.

 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 내는 마음을 이르는 것이니, 소위 삿된 욕심을 피하고 승부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진실로 참다운 바둑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내는 마음이니 이겼다고 좋아하지 말고 졌다고 성내지 아니하는 수양의 경계를 이르는 말이다.

무엇을 일러 치라 하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마음을 이르노니 자기 혼자만의 판단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자신도 없고 상대도 없는 오직 바둑 그 자체에서 수를 구하라 이르는 것이다. 그 경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둑의 오묘한 세계를 접할 마음의 자리가 잡히는 것이다.」

동삼의 안면근육이 실룩거린다. 스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삼은 정면으로 스승을 치고 나온다.

「스승님 말씀은 잘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나 방금 스승님의 말씀도 전부 승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곧 승부를 떠나서는 바둑이 있을 수 없다는 반증이 아니올는지. 바둑에 승부가 없다면 왜 그런 가르침이 필요하겠는지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왕적신(王績薪)의 위기십결(圍碁十訣)에 보아도 그 첫머리에 부득탐승(不得貪勝)을 올려 놓은 것은 스스로 승부를 떠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네 이놈! 선인의 말을 네 마음대로 해석하는 못된 버릇은 어디에서 배웠느냐. 네가 진실로 부득탐승의 뜻을 몰라서 그리 말하느냐!」

설숙의 얼굴이 노기로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이미 내친 걸음, 동삼은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바둑에 승부가 없다 함은 바둑을 학문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결국 설숙의 입에서 노성이 터진다.

「이런 발칙한 놈!」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 본다. 동삼은 냉정하리만큼 차가운 스승에게 필사적으로 버틴다.

그 사건 이후 설숙과 동삼은 거의 한 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고 지냈다.

동삼은 꾸준히 자기 할 일만 했다. 어차피 고가의 생계를 걸머진 몸이었기에 낮에는 계속 일을 하고 밤이면 혼자 바둑공부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