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攻·守)의 원리에 대해 말해 보아라.」

바둑이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스승이 물었다.

다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반. 스승이 문답을 요구하기는 처음이었다.

아버지 평사의 손에 이끌려 도장에 들어섰던 이래로 동삼은 스승과 단 한 번도 지도대국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재사가 다녀간 얼마 후 난생 처음으로 스승과 대국을 하며 동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재사보다는 조금 윗길일 것이라는 단순한 추측과는 달리 막상 부닥쳐 본 스승의 기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동삼은 스승에게서 명인(名人)의 모습을 보았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명인의 참 모습을.

유민재가 죽고 두 번째 도장을 나왔을 때 동삼은 호구지책으로 심심찮게 바둑을 두었다.

대부분의 생계 수단은 막노동으로 해결했지만 여름 장마철 비수기나 겨울에는 바둑으로 연명했다. 그때 내기바둑을 두며 동삼은 자신의 바둑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걸 확인했다.

2년이 넘는 기간을 떠돌아다니면서 동삼은 크게 힘든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과 두어도 승부를 결할 자신이 있었다. 때마침 일본으로부터 덤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승부의 기준이 보다 명확해지는 과도기였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맨 처음 스승과 두 점 바둑을 두며 동삼은 승부가 될 줄 알았다.

혼자 생각이긴 했으나 이재사와의 바둑이 동삼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동삼의 예측은 빗나갔다. 두 점으로 완벽하게 밀리고 나서야 동삼은 어찌하여 스승이 벽송의 주인이 될 수 있었는가를 절감했다.

모든 바둑의 기준을 정명운으로만 생각했던 동삼은 비로소 또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 넓은 세상에서는 정명운도 하나의 작은 봉우리에 불과했다. 드높은 스승의 바둑 앞에서 동삼은 전율했다. 그리고 동삼은 설숙이라는 높고 고결한 세상에 기필코 도달하고자 하는 확고한 목표를 세웠다.

동삼은 온종일 공부를 했다. 품일을 나가거나 텃밭을 맬 때, 동삼은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온갖 수를 그렸다. 세상 모든 것이 바둑판이었다. 모를 심는 못자리도 바둑판이었고 밭에 나 있는 고랑도 훌륭한 바둑판이었다. 동삼은 어둠이 내리면 가물거리는 남폿불 아래서 거의 새벽까지 공부에 매진했다. 동삼의 휴식 시간은 바둑판 앞에서 쓰러져 잠드는 새벽녘 두어 시간이 전부였다.

처음 한동안 스승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실전대국을 해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 바둑에 대해 말이 없었다. 그러던 스승의 첫 가르침은 다시 바둑을 배운 지 반 년 만의 일이었다.

스승과 바둑을 두던 도중 초반 포석의 기로에서 동삼은 한 시간 넘게 장고하고 있었다. 수순을 여러 갈래로 상정해 놓고 그 후의 변화와 가치를 검토하며 동삼은 쉽게 착수를 하지 못했다. 묵묵히 동삼의 착수를 기다리던 스승이 처음으로 바둑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했다.

「애써 좋은 수를 두려 하지 마라. 무리하여 호수를 놓게 되면 필경 그것이 승부를 그르친다.」

이제껏 말 한 마디 없던 스승의 가르침에 동삼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한번 시작한 스승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집착하지 마라! 집착하면 궁색해진다. 투지는 겸양에 못 미치고 집착은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데 어찌 수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겠느냐!」

꽉 막혔던 동삼의 숨통이 일시에 터졌다.

그 후로 스승은 드문드문 동삼에게 바둑의 요체(要諦)를 일러 주었다.

1년이 지나 두 점으로 스승을 극복한 직후 처음 선으로 두어 대패했을 때 스승은 동삼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심(邪心)을 극히 염려했다.

「버리고 취함이 극명해야 한다. 작은 것에 연연하면 대세를 보는 눈이 멀어질 것이며, 대세를 놓치는 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모름지기 온후해야 하고 청정해야 하며 넓고 깊어야 한다.」

그것은 스승의 오랜 대국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스승의 가르침은 대부분 바둑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더러는 국한된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세력을 고수하느냐 실리로 선회하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 스승은 동삼을 조용히 타일렀다.

「세력과 실리는 같은 이치다. 세력을 모르고 실리를 논할 수 없고 실리를 모르고 세력을 논할 수 없다.」

그때 동삼이 반론을 제기한 건 좀 이례적인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기풍이란 건 필요하질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형태에 구애받지 마라. 꼭 어떤 기풍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2년 가까이 피나는 노력을 했건만 스승이 내린 묘리(妙理)는 간 데 없고 여전히 기예(碁藝)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스승은 자신을 크게 꾸짖었다.

「행마의 도리가 죽고 사는 도리다! 왜 모르느냐!」

스승의 그 한마디는 동삼의 폐부를 찔렀다. 동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 오는 순간 스승이 덧붙였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을 금한다. 그 반대도 금한다. 그것을 구별할 때 비로소 고수의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렇듯 스승은 꼭 필요한 순간에 가장 적확한 말로 동삼의 맺힌 곳을 풀어 주었다. 특이한 점은 같은 여목 스승의 제자이면서 똑같은 내용을 두고 아버지 평사와 스승의 표현은 전혀 달랐다.

승부처에 대한 시각이 그 중 하나였다.

한번은 복기 검토중에 동삼이 스승에게 무심코 물었다.

「이곳이 승부처가 아닙니까?」

승부처란 말에 스승이 정색을 하고 동삼을 쏘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바둑에 승부처가 어디 있더란 말이냐. 냇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는 법, 매수마다 승부처임을 각별히 명심하여라.」

어린 시절, 한 판의 바둑에서 승부처는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다. 그때 판을 결정해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과 궁극적으로는 같은 뜻인데 스승과 아버지의 승부에 대한 표현은 여실히 달랐다.

가장 최근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얼마 전 섣부른 공격으로 스스로 사사로움에 빠져 들어 난감해하는 동삼을 보고 스승은 눈쌀을 찌푸렸다.

「깊이로 잡아야지 재주로 잡아서는 못 쓴다.」

스승은 꾸준히 자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근간에 와서 흑을 쥔 동삼에게 서서히 승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읽기의 눈이 깊어지면서 동삼은 이제 두 가지의 바둑을 조금씩 혼합해 나갔다. 하나는 어릴 적부터 몸에 익어 온 두터움을 지향하는 바둑이었다. 또 하나는 언제부턴가 무의식의 저변에서 깊이 웅크리고 있던 아버지 추평사의 유산이었다. 그 유산이 오랜 세월의 껍질을 깨고 조금씩조금씩 동삼의 온몸에 녹아들었다. 아직은 미흡했지만 동삼의 바둑에는 대를 이어 온 승부의 기질이 언뜻언뜻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