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사는 거침없이 말을 잇는다.

「천리 길을 찾아온 사람에게 그냥 돌아가라 함은 국수의 풍모가 아닐 것이오.」

설숙이 이재사의 말을 자른다.

「정녕 그대가 내 뜻을 모르오?」

기도를 언급하는 설숙의 말을 이재사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이재사는 설숙의 예봉을 기세로 맞선다.

「그 어떤 이유도 승부를 막을 순 없소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강하게 부딪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재사의 기세는 활활 타오르고, 반대로 설숙은 침울해진다.

문 밖에서 두 사람의 거동을 지켜보는 동삼은 조마조마하다. 이재사가 제자를 운운하자 동삼은 스승에게 죄스럽다. 스승의 바둑은 알 수 없지만 동삼이 보기에 이재사의 바둑은 기량이 뛰어났다.

차라리 이재사가 그냥 돌아갔으면…….

동삼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다. 얼마 후 방 안에서 스승의 말이 들려 왔다.

「정히 그대가 원한다면…….」

이윽고 방 안에서 돌 놓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한다. 만월에서 하현으로 이지러지는 달빛 아래서 동삼은 꼼짝없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달빛이 훤한 고가의 밤. 달빛은 섬돌을 적시고 툇마루를 적시고 동삼의 발목에 와 닿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두 사람의 바둑을 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동삼은 몸이 달았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승의 바둑이 궁금해서 동삼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 유리할까. 만약 스승이 지기라도 한다면…….

돌 놓는 소리가 늘어 갈수록 동삼은 입안이 바짝 마른다. 겨울 밤의 싸늘한 야기(夜氣) 속에서 동삼은 밤새도록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드문드문 들리던 바둑돌 놓는 소리가 잠시 정적에 빠지더니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누군가 패국을 인정했고 돌을 거두는 소리였다. 동삼의 흥분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어느 쪽이 이겼든 승부는 이제 끝이 났다. 동삼은 스승이 이겼기를 간절히 바란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스승이질 않은가.

바둑돌 놓는 소리가 멎었고 방 안은 고요하다. 잠시 후 이재사의 음성이 두런두런 새어 나온다.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이재사의 목소리였고 스승의 말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덜컥 방문이 열린다. 이재사가 앞서 나오고 스승이 뒤처져 나온다. 동삼은 재빨리 두 사람의 기색을 살핀다. 설숙 스승의 낯빛은 침울하고 이재사의 표정은 편안하다.

스승이 졌구나!

스승의 모습은 동삼의 짐작을 보다 구체화시켜 주었다.

삽짝 밖에서 스승과 이재사는 서로 헤어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스승의 뒷모습은 여전히 무거웠다.

동삼은 급히 이재사의 뒤를 쫓아갔다.

「가십니까?」

겨울 아침 투명한 햇살 아래 선 이재사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다.

「젊은이.」

「예.」

「스승님을 잘 보필하게.」

스승의 어두운 얼굴과 이재사의 밝은 얼굴이 뒤섞인다.

역시 스승이 졌구나.

동삼은 고개를 떨군다.

「자네 스승님은 진정한 국수일세. 그걸 확인한 게 무엇보다도 기쁘이.」

이재사의 말이 이상하다. 그렇다면…….

「자네 스승을 통해 넓고 넓은 세상의 이치를 배웠네.」

동삼의 발길이 제자리에 멎는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건 하늘이 내린 천복일세.」

이재사는 휘적휘적 마을 어귀를 돌아서 돌담길을 걸어간다.

이재사가 다녀간 지도 열흘이 지났다. 동삼은 그날도 밤늦도록 이재사와 둔 자신의 바둑을 복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의 모멸감, 수치심이 새삼스레 가슴을 찌른다. 차라리 제자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해 본다. 무모한 도전, 무리한 치수였다.

스승의 기력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스승의 바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명운에게 선으로 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재사와는 두 점이면 해 볼 만하다. 그렇다면 확실친 않지만 이재사를 이긴 스승과 자신의 치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승의 바둑에 생각이 미치자 동삼은 스승의 기력에 대한 궁금증으로 애가 탄다. 하지만 스승의 기보는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스승은 거의 바둑을 두지 않았다. 스승은 일생 동안 제자들의 훈육에만 신경을 써 왔다.

별안간 방문이 확 열린다. 방 밖에는 뜻밖에 스승이 서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꿈을 꾸듯, 환상을 보듯 동삼은 스승을 바라본다. 스승이 방으로 들어온다. 스승의 얼굴에 장엄한 대가의 기상이 엿보인다.

스승은 동삼이 복기중인, 이재사와 동삼이 두었던 바둑을 바라본다. 반상을 보던 스승의 무쇠 같은 얼굴이 꼭 한 번 일그러진다. 동삼은 어쩔 줄을 모른다. 스승의 위엄에 짓눌리어 질식할 것만 같다. 스승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준열한 기세에 동삼은 몸이 자꾸 움츠러든다.

스승은 바둑판 앞에서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윽고 스승이 판 위의 돌을 손수 쓸어 담았다. 돌을 다 쓸어 담은 스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삼의 마음이 두근반 세근반이다.

「마음을 편안히 하도록 해라.」

고가에 와서 처음 스승이 제자에게 내린 말이다.

스승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방 안으로 찬 기운이 밀려든다. 동삼은 으스스 몸을 떤다.

삽짝 밖에서 설숙은 하늘을 본다. 하늘은 희끄무레했다. 동편 하늘에 그믐달이 걸려 있다. 달 주위로 한 무리 구름이 몰려든다. 달은 이내 구름 속으로 묻혀 버린다. 희미한 구름 언저리에서 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달이 흐른다. 구름 따라 달이 흐른다.

칼날 같은 고뇌 속으로 정한(情恨)의 세월이 흐른다.

그래, 이젠 진심으로 받아 주자.

설숙은 장탄식을 한다.

어차피 저 아이의 인생도 바둑에서 시작해 바둑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세출의 천재였던 추평사. 설령 평사의 자질이 그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평사는 바둑으로 한 인생을 이루고 마감했을 것이다. 그토록 평사는 바둑에 온몸을 던진 인간이었다. 동삼도 그 점에서는 평사에 결코 뒤질 게 없었다.

이젠 진심으로 받아 주자.

설숙의 마음은 평안했다.

1주일 후 설숙은 정식으로 동삼과 마주 앉았다. 그 첫날의 가르침은 한 판의 바둑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