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반까지 혼미에 혼미를 거듭한 판이었지만 마지막 끝내기를 하며 동삼은 한 집 승리를 확신했다. 최대포는 갈수록 기력이 높은 강자들을 동삼 앞에 데려왔고 동삼은 기도정신에 입각하여 한 판 한 판 최선을 다해 대국에 임했다.

계가를 하자 뜻밖에도 한 집이 부족했다.

최대포가 애써 동삼을 위로했다.

「괜찮아.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

「그게 아니고…… 분명 제가 한 집 이겼는데…….」

동삼의 말에 최대포가 정색을 한다.

「그러게, 내가 보기에도 비기거나 최소한 한 집은 이긴 것 같았는데…… 틀림없나?」

「예.」

동삼이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최대포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그는 대뜸 상대방 대국자에게 삿대질을 퍼부으며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놈 이거 순 사기꾼 아냐! 어디서 어린애를 상대로 계가를 속이는 거야!」

순간 동삼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최대포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야이, 사기꾼아! 계가를 속여! 계가를!」

최대포가 펄펄 뛰며 악을 쓴다. 상대는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더 큰소리로 맞받아 쳤다.

「아니, 이 양반이 누구를 사기꾼으로 몰아! 내가 무슨 사기를 쳤다고 그래. 증거를 대 봐, 증거를!」

「그래 복기해 보자! 복기를 해 보면 알 거 아냐!」

최대포가 계속 밀어붙이며 다그치자 상대방은 오히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비웃었다.

「이 양반이 장사 한두 번 해 보나. 내기바둑에서 복기가 어디 있어, 계가 끝났으면 그것으로 종 친 거지.」

이미 이성을 잃은 최대포는 상대방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야, 이놈아! 이게 얼마짜리 판인데 그래! 어린애를 상대로 사기나 치고, 이놈 잘 만났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도대체 얼마를 챙긴 거야!」

동삼은 그제서야 사건의 전말을 확실히 파악했다. 바둑을 지고 허탈해하던 몇몇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방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차려 놓은 술상이 엎어지고 사람들은 두 패로 갈라져서 서로 멱살을 틀어잡고 뒹굴었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숙향이었다.

옥화를 앞세우고 숙향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철없는 아이를 야비하게 이용하다니…… 최선생! 이럴 수가 있소!」

숙향의 매서운 시선이 최대포의 얼굴 한가운데 꽂힌다.

최대포는 방 한가운데 말뚝처럼 서 있었다.

「어서 썩 내 집에서 나가시오!」

숙향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동삼을 데리고 나간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가며 동삼은 흘깃 최대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날 밤, 동삼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로소 동삼은 그 동안 석연찮게 느껴졌던 점이 하나 둘 이해가 되었다. 고향의 아들 운운하던 최대포의 말은 전부 거짓이었고 자신에게 선물을 사 주고 돈을 준 것도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삼은 최대포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떠돌면서 그 세계를 나름대로 이해한 탓도 있었지만 왠지 그 사람이 나쁜 사람같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든 동삼은 누가 자신을 흔드는 바람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자시오. 어머니가 찾으시오.」

옥화였다. 바깥을 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그녀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반짝인다. 단정한 이마와 시원스런 눈매가 아름답다.

「어머니는 간밤에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소.」

그녀의 몸에서 여자의 체취가 풍겨 나온다. 그녀가 건너가고 한참 후에야 동삼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숙향은 하룻밤 새 눈두덩이가 꺼졌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숙향은 말이 없다.

숙향은 가늘게 한숨만 내쉰다.

이윽고 숙향이 결단을 내린다.

「짐을 꾸려라. 죽은 네 어미를 생각해서 나는 너를 내 아들처럼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나는 그것이 내 욕심이란 걸 깨달았다.」

「…….」

「아무래도 이곳은 너에게 적합한 장소가 아닌 것 같구나. 여기 더 있어 봐야 이곳은 네가 배울 것이 전혀 없는 곳이다. 화정이를 생각해서라도 더 일찍 너를 이곳에서 내보내야 했건만…… 내 욕심이 과했나 보다.」

「…….」

「미안하구나.」

정원에서 새소리가 들려 온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느냐?」

동삼을 바라보는 숙향의 눈길이 애잔하다.

「내 생각에는 설숙도장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동삼은 잠자코 있다.

「어디 가든 힘들고 지치면 찾아오너라.」

숙향의 음성에 물기가 배어 나온다.

「박복한 년이 이제야 정 붙이고 사나 했더니…….」

기어이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동삼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무도 믿고 의지할 데 없는 그녀의 쓸쓸한 삶이 문득 슬픔으로 와 닿았다. 엄격하고 담대해서 여장부로 평판이 자자하던 그녀가 자신에겐 왜 그리 유독 따스한 눈길을 주었는지 동삼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이리저리 부대끼며 깨어지고 멍든 그녀의 삶에서 유일하게 정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자신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외롭고 지친 그녀의 삶을 스스로 보상이라도 하듯 자신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다는 걸. 이 외로운 여자가…….

짐이라야 쌀 것도 없었다. 조그만 가방에 옷가지 몇 개 넣은 것이 전부였다. 가방을 들고 나서려는데 옥화가 들어온다.

「가시오?」

「…….」

「그 동안 내가 너무 쌀쌀맞았소.」

「아니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소. 왠지 그쪽만 보면 화가 나고, 말없이 가만 있으면 무시당하는 것 같아 속이 상했소.」

옥화가 한 발 동삼 앞으로 다가온다.

「이거.」

옥화의 손에 흰 목도리가 들려 있다. 눈처럼 하얀 털목도리다.

「돌아다니다 보면 추울 거요.」

옥화는 목도리를 동삼에게 건네고 돌아선다.

동삼이 물끄러미 옥화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숙향은 큰길까지 동삼을 따라 나왔다. 날씨가 풀려 봄기운이 완연했고 어느새 사람들의 옷차림이 화사했다. 마포 강변 쪽 길을 따라 선홍빛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헤어질 때 숙향은 동삼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동삼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숙향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마포 강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제서야 숙향이 한마디 했다.

「잘 가거라.」

진달래 꽃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삼을 보며 숙향은 언젠가 자신을 찾아왔던 평사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