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와의 오랜 만남을 청산하고 평사는 게이오와 함께 아오모리항을 떠났다. 아오모리에서 배를 타고 하코다데로, 하코다데에서 열차를 타고 다시 오타루로 향했다.

9월의 북해도는 아직 수확기인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떨어져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할 지경이었다.

9월 하순, 평사는 오타루의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산쓰이도장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호리에 마나부(堀江學) 관장 외에 십수 명에 달하는 원생들이 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여행중에 무슨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호리에 관장이 일본 전통의 기모노를 걸치고 평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호리에 관장과 평사는 꿇어앉아 서로 마주 보고 절을 했다. 조선의 예법으로 보아 20대 후반의 젊은 평사에게는 좀 과분한 치레였다.

호리에 관장은 평사에게 원생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했다.

「이쪽은 다카하시(高橋), 이쪽은 이마무라(今村), 이 사람은 도미노(富野)…….」

원생들은 40대의 장년에서부터 10대의 소년까지 그 연령층이 다양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추선생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형격으로 보이는 다카하시가 평사의 손을 잡았다. 평사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원생들이 모두 물러가자 호리에 관장이 입을 열었다.

「게이오에게 대강 말씀을 들었을 줄 압니다만 우리 산쓰이도장 사람들은 참으로 한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항상 우리는 일본 기계에서 이단의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북해도에 있는 시골 무지렁이 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니까요.」

눈 고장답게 뜰에는 첫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그 동안 나름대로 많은 기재를 받아들여 저희들 도장의 원을 풀어 보고자 하였으나 어차피 바둑은 걸출한 천재에 의해서 빛을 발하는 법,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 내지 못하여 아직도 일본 본토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가 게이오에게 추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추선생이 그간에 두어 온 기보를 검토해 본바 선생이야말로 그 오랜 세월 동안 저희들이 갈구해 왔던 조건에 부합된다는 결론을 얻고 지금에야 모시게 된 것입니다.」

「…….」

「며칠간 여독을 푸신 후 저희 도장 원생과 대국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올 겨울에는 이곳에서 저희들과 바둑을 연구하시고 결례가 안 된다면 저희 도장 출신으로 나가셔서 본토의 콧대 높은 기계에 북해도의 산쓰이도장이 결코 이방인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산쓰이의 100년 한을 풀어 주십사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고 그것이 저희가 선생을 초청한 이유입니다. 물론 당장 그 대답을 듣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호리에 관장은 이야기 도중 산쓰이도장 출신 운운하며 슬쩍 평사에게 운을 떼어 본다. 평사는 말이 없다. 창 밖으로 멀리 요테이산(羊蹄山)이 보인다.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준코야！」

호리에의 말이 떨어지자 미닫이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르 열렸다. 방 밖에는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꿇어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호리에 관장은 평사에게 여자를 소개시켰다. 여자는 평사에게 선 채로 절을 했다.

「바둑에 심취해 혼기조차 넘긴 제 조카딸입니다. 준코(純子)라고 불러 주십시오. 거처하시기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라도 준코에게 말씀하십시오.」

눈 내리는 뜨락을 가로질러 별채를 향할 때에야 평사는 준코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 전형적인 일본 여자였다. 게이샤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가깝게 접하는 여자였다.

일본 여인의 예법은 까다로웠다. 준코는 먼저 방문 앞에 꿇어앉아 문을 열어 준 다음 평사가 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 후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일본 여인의 극진한 예법에 일면 거북한 느낌을 받았다. 평사는 노곤한 몸을 자리에 뉘었다.

그때 준코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어…… 목욕물을 데워 놓았습니다. 씻고 나시면 안마사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늘상 보아 왔던 것이지만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성에 대해 많이 개방된 나라였다. 외간 남자에게 목욕물 운운하는 것은 조선의 여염집 여인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평사는 욕탕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평사가 벗어 놓은 옷 대신에 곱게 갠 유카다(목욕 후 입는 무명 홑옷)가 놓여 있었다.

유카다를 입고 방으로 돌아오니 방 안에는 한 여자가 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마사였다. 평사는 막연한 심정으로 안마사에게 몸을 맡겼다.

이틀 후, 거실에서 다시 만난 호리에 관장은 다카하시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독은 좀 풀렸습니까, 추선생?」

「예.」

「그렇다면 오늘쯤 여기 있는 다카하시와 시범대국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다카하시가 바둑판을 가져와서 평사 앞에 놓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