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적막이 흘렀다. 강대한의 말에 한영운조차도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몰래 잠입해서 몇 가지 물건을 탈취하는 수준의 도발과는 한일 양국에 끼칠 후폭풍이 비교가 되지 않는 위험한 일이었다. 거사를 일으키는 당사자의 목숨은 고사하고, 자칫 양국 간의 무력도발을 불러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서 한, 일 양국은 영원한 적대국가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한영운은 우선 이 젊은이의 혈기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네가 우리와 함께 공부를 하면서 일제의 잔혹함과 무도함을 알게 되고, 반성하지 않는 저들의 모습에 분노하는 마음이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죄를 저지른 일본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네. 또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진정한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취할 방법이 아닐세.”

“‘악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을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뒷일을 생각하고 악을 징계하지 못하면 불의는 더욱 강성해집니다.”

그는 강대한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그를 막을 길이 없음을 알았다.

‘젊은 사람의 혈기를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해’

그는 최선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를 느꼈다.

“강군! 우리 조금 더 시간을 가져본 다음에 다시 얘기를 나눠보세.”

한영운에게 조카의 의지를 전해들은 최선미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거사를 하고 난 뒤에 대한이를 죽게 두지 않고 한국으로 데리고 올 방법은 있습니까?”

“물론 가능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설의사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내가 우리 정부를 믿었고, 일본 정부의 야비함을 잠시 잊은 때문입니다. 제가 여사님에게 큰 죄를 지었음을 자백합니다.”

한영운은 자신의 대원인 최선미에게 ‘의사’의 유족으로 예우를 깍듯하게 하였다.

“총사령관님께서 저를 불려 상의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제 남편과 같은 일이 제 조카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실 방안이 있다면, 저는 대한이가 거사를 하도록 허락해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이는 제 남편의 미완에 그친 거사를 제 조카가 완성시켜주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드리는 바람입니다.”

“최여사님, 다시 강조드리지만, 설의사의 거사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야스쿠니 물건이 다시 신사로 돌아갔지만, 그 성취는 이미 세계만방에 드러났습니다.”

“그렇다 한들, 그 물건들은 다시금 제 자리에 있습니다. 제게는 그 사실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시 여쭙고 부탁드립니다. 거사 후 대한이를 살려서 한국에 데리고 올 방법을 찾아주시고, 거사를 도와주십시오. 일본에 남편을 빼앗긴 여자로서의 부탁입니다.”

한영운은 거부할 수 없었다.

“제 대원들과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거사를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과 검토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준비 되는대로 여사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드시 제 조카를 살려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집에 온 최선미는 조카들을 불렀다.

동생의 결심을 이모로부터 들은 강민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주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동생에게 자신의 생각을 너무 강하게 표현한 것 때문에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 같아 미안했고, 위험한 일에 나서는 동생이 안쓰러워 안타까웠다.

“대한아! 정말 네 결심을 바꿀 수는 없는 거야?”

울먹이며 말하는 누나를 강대한은 오히려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동생의 듬직하고 대견한 모습에 누나는 또 울컥해졌다.

“민희야!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자. 이모가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대한이가 다치지 않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드리고 왔다. 이모는 그분들이 대한이를 잘 보호해서 우리가 지금처럼 이곳에 같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줄 거야.”

이모의 당부 섞인 바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강대한은 야무지게 닫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입을 열면 자신의 굳은 의지가 허물어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치 입을 열면 ‘이모, 누나 나 무서워’ 라고 말해버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치 입을 열면 자신의 날선 결심들을 적들이 알아채버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일본으로 돌아온 아들을 최선애는 반가이 맞았다. 하시모토도 아들을 푸근하게 맞이하였다. 가족을 만나는 강대한의 얼굴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우리 아들 얼굴이 평온해 보인다. 한국에 다녀오니 좋은 모양이네.”

“그러게! 마음이 무척 안정되어 보인다. 한국의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지?”

“예, 다들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 한국에 다녀오니 마음이 홀가분해졌어요. 이제야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은 느낌이에요. 그동안 염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네가 이렇게 안정된 모습을 보니 무척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본의 할아버지도 너를 많이 염려하셨다. 나중에 전화라도 드려라.”

“예, 아빠. 곧 찾아뵈려고요.”

“그래. 이제 무엇을 할 계획이지?”

“당분간은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지난번에 했던 자원봉사를 계속하면서 앞날을 고민해보려고요.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신사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신대요.”

“그러렴. 네가 그동안 그곳에 무척 열심이어서 그곳 직원들이 네 걱정을 많이 했구나. 어디에서든 열심히 생활하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거야.”

세 사람은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했다.

신사의 직원들은 그가 나타나자 반가이 맞아주었다. 신사 직원들 입장에서는 신물을 되찾을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의 공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신사의 최고 책임자인 수석궁사는 그를 집무실로 직접 불러서 그의 공을 치하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강대한은 다시 ‘타이키’로 행동했다.

‘적을 속이려면 자신마저도 속여야 한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영운이 그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치밀한 준비만이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 준다.’

이미 알고 있는 신사의 내부를 정밀하게 실측하여 도면화 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라고 지시하며 그가 덧붙인 말이다.

한영운은 모든 작전을 직접 챙겨나갔다.

‘이 거사를 위해 내가 세상에 존재한 것이었구나.’

소명의식마저 느끼며 그는 자신과 조직의 모든 것을 집중시켰다. 이 거사가 가져올 후폭풍은 다음 세대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 거사 후 모든 책임을 떠안고 소멸한다.’

60을 넘기도록 살았으면 세상에 태어나서 모든 것을 누린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은 덤이다. 가치 있는 일을 이루어낸다면, 덤으로 살게 될 나머지 삶쯤은 포기하는 거 하나도 아쉽지 않다. 그는 젊은 강대한이 오히려 자신을 가르쳤음을 알았다. 그가 자신에게 소명에 눈을 뜨도록 이끌어주었음이 감사하고 다행스러웠다.

강대한은 일본으로 떠나며 거사일을 수요집회가 1000번째를 맞게 되는 날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일본인으로 산지 1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며, 겨울철이라서 폭발물을 은닉하는데도 그 시기가 적당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약관을 넘기고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젊은이의 치밀함은 그가 이 거사에 임하는 마음을 대변했다.

‘그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 거사 후 소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몫이다.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모든 것을 쏟아 붇는 마음에는 혼이 깃든다. 혼이 깃든 마음은 상상에서만 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들어내고는 한다. 대한독립의군부의 모든 대원은 이번 거사를 위해 총력 지원태세를 가동하고 있었다. 해외에 있는 대원들도 예외가 없었다.

치요다구 구단키타 1구역.

이곳에서 카레가게를 운영하는 요시다는 11월 초에 열리는 일본 최대의 카레축제를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다양한 식자재를 한국에서 자주 공급받기도 하는 그는 이번에 각종 식재료들과 함께 은밀한 물건을 받았다. 한영운은 야스쿠니 신사 내에 있는 임대업장도 운영 중이고, 일본에서 암약하는 대원중 가장 적극적인 그를 통해서 폭발물을 신사 내로 반입시키는 작전을 세운 것이다. 처리할 건물은 배전과, 본전, 봉안전으로 정했다. 세 건물 모두 목조건물이어서 폭약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타이머가 필요하여 간단한 세팅작업을 거쳐야 하므로 한국에 있을 때, 강대한은 폭발물 조작에 필요한 교육을 이수했었다.

만반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요시다는 건물이 폭파되는 것을 확인한 즉시 강대한 모자와 같이 니시가라쓰항으로 가서 밀항선을 타는 것으로 거사는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