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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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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59회] 12부 떠도는 부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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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작은 평사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2년 전 자신의 집을 들락거리다가 평사가 그의 스승으로부터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전해 듣고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관계로 평사가 경성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선뜻 평사를 만나기가 꺼림칙했다. 남작은 최근 조선 총독부 나카지마 참사관 집에 또다시 일본의 전문기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조선인 국수급을 상대로 내기바둑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했다. 남작도 한두 번 사람을 내세워 승부를 해 보았지만 번번이 대패하여 그동안 적잖이 손해를 봤다. 그렇게 되자 남작은 평사를 필요로 하게 됐고, 몇 차례 자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정 역관을 통하여 평사를 데리고 오라고 은밀히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내 과거 자네 바둑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 이제까지 자네만큼 기예가 출중한 사람은 보지 못했네. 사실 자네 바둑 생각을 많이 했었지. 나카지마 참사관 집에 유숙하는 게이오(芸雄)라는 그 일본 기사 말일세. 자네 같으면 그 자를 누를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보는데.」 「…….」 「어떤가? 언제 날을 잡아 그 사람과 한번 두어 보지 않겠나? 지든 이기든 내 대가는 충분히 지불함세.」 「그러지요.」 평사가 의외로 순순히 응낙하자 남작은 흡족해하며 평사의 손을 잡았다. 평사는 남작을 보며 스승에게 쫓겨나 떠돌아다니던 이태 전의 일이 떠올랐다. 부산 부둣가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시절, 한번은 일이 끝나고 인근 부둣가 술집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중 옆자리 손님들과 사소한 시비가 일어났다. 밀고 당기는 가운데 술에 취한 평사의 동료 중 한 사람이 상대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주먹이 오가고 급기야 패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순사들에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잡혀 갔다. 조사를 받은 다음 평사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추평사.」 조선인을 개돼지 취급하는 일본 순사에게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한 평사가 부어 오른 얼굴로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돌아보았다. 철창 앞엔 빵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턱수염을 기른 신체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나와.」 사내는 열쇠로 철창 문을 따고 평사를 끄집어냈다. 「따라와.」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평사는 그 사내의 뒤를 따르면서 사내의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취조실로 들어간 사내는 평사에게 앉으라고 권한 후 직접 물을 한 잔 가져와 평사에게 권했다. 「날 모르겠나?」 사내는 깊숙이 눌러 쓴 빵모자를 치켜 올렸다. 그제서야 평사는 사내를 알아보았다. 10여 년 전에 야반도주하여 홀연히 사라진 박두칠(朴斗七)이었다. 박두칠은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형이었다. 그의 집안도 대대로 소작을 일구며 살아온 머슴의 집안이었다. 「봉화…….」 「그래, 나 박두칠이다.」 박두칠은 평사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평사의 손만 잡고 있던 박두칠은 평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경찰서를 나온 박두칠은 근처 큰 음식집으로 평사를 데리고 가서 고기와 술을 시켰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일본 순사 앞잡이다.」 박두칠은 그 한 마디로 자신의 지나온 과거와 현재의 입장을 정리했다. 그날 평사와 박두칠은 밤늦도록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헤어질 때 박두칠은 평사에게 얼마간의 돈을 건네 주었다. 「나라야 어찌 됐든 난 상관 안 해. 왜놈이면 어떻고 떼놈이면 어때. 우리 같은 종놈 신세야 다 똑같은 게 아닌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놈들 막상 내 앞에 서면 고양이 앞의 쥐새끼처럼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걸. 솔직히…… 솔직히 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배부르게 산 적이 없었다. 왜놈 세상이면 어때, 까짓거.」 박두칠은 그렇게 말하며 술에 취해 흐느적 흐느적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모레쯤으로 날짜를 잡지.」 남작의 말을 들으며 평사는 묵묵히 그를 바라본다. 남작의 얼굴 위로 박두칠의 얼굴이 겹쳐진다. 일본기원 4단이라는 게이오의 기력은 평사가 여목도장 시절에 두었던 야마다나 기무라에 비해 조금 윗길이었다. 조선 총독부 참사관 나카지마의 집에서 벌어진 두 번의 대국에서 처음 흑을 쥐었던 평사는 시종일관 판을 압도하여 쉽게 불계승하였고 두 번째 판엔 백을 쥐고도 어렵지 않게 게이오를 눌러 버렸다. 두 판 다 완승을 하였기에 더 이상 참사관 집에서 바둑을 둘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나카지마는 며칠 후 남작과 평사를 정식으로 다시 초대했다. 나카지마는 적지 않은 돈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갑게 평사와 남작을 맞이했다. 나카지마의 집은 전형적인 적산가옥으로 다다미를 깐 넓은 거실에는 미리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시원스럽게 열어젖힌 창문 밖으로 공들여 가꾼 잘 다듬어진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가산 밑에는 인공으로 만든 큰 연못이 있었고 연못엔 팔뚝만한 비단 금붕어가 왔다갔다 한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나카지마가 자그마한 눈에 웃음을 담고 두 사람을 환대한다. 「안녕하시오.」 평사가 자리에 앉자 건너편에 있던 게이오가 평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카지마가 도자기 병에 옮겨 따끈따끈하게 데운 마사무네(일본식 정종)를 남작과 평사의 술잔에 따랐다. 술이 몇 잔 오간 뒤 나카지마가 말문을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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