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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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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55회] 12부 떠도는 부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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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복기를 하다가 말고 정 역관과 평사를 흘깃흘깃 쳐다본다. 근 1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 동안 어디 있었나?」 1년 만에 평사는 초췌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돌아와 정 역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정 역관과 평사에게 집중된다. 의식해서가 아니라 평사는 그것이 거추장스러웠다. 「나가세.」 정 역관이 평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많이 상한 것 같군.」 평사는 말없이 정 역관 뒤를 따라간다. 안채로 돌아드는데 아침 나절만 해도 멀쩡하던 날씨가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키 큰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바둑을 다시 두어 보려 합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무겁게 닫혀 있던 평사의 입이 열렸다. 평사의 말에 정 역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원래 바라던 바지만 안타깝군.」 평사의 눈이 정원의 시든 동백나무에 가서 멎는다. 정 역관은 그의 눈이 어둡게 느껴진다. 음울하고 황폐하다. 옛날 여목 선생이 한눈에 반했던 눈이 아니던가. 정 역관은 비애에 젖는다. 「그래 돌아다녀 보니 어떻던가?」 정 역관의 말에 평사는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는다. 「하긴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겠지. 나도 자네만한 나이에 많이 돌아다녔어.」 어느새 평사의 잿빛 눈길은 사라지고 그의 눈에 허허로움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기껏 20대의 나이건만 세상을 많이 산 얼굴이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게 해주십시오.」 「좋도록 하게.」 정 역관은 반쯤 남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평사가 정 역관의 집에 기거한 이후부터 바둑을 두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사는 화제의 대상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현대 바둑이든 순장 바둑이든 아무도 평사를 당해 내지 못했다. 몇 번에 걸친 현상 바둑에서 평사는 모든 상금을 독식해 버렸고, 정 역관이 주선한 너덧 번에 걸친 내기바둑에서도 상대들은 단 한 차례도 평사를 이기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서 평사의 바둑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평사를 이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양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순장 바둑의 일인자 김용택이 소문을 듣고 평사와 일전을 벌이고자 방문했다가 무참하게 무너진 채 귀향길에 올랐고, 부산에서 자칭 국수라고 떠벌이던 홍희표는 두 점으로 평사에게 무릎을 꿇었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승부사 편춘섭(片春燮), 그 대승부사 편춘섭이도 평사에게 걸려 고향에 있는 전답을 사그리 날렸고 일본 가서 바둑을 배워 왔다던 이원하(李元河), 일본 정상급 전문기사에게도 선으로 쉽게 지지 않는다는 그도 평사에게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선으로 내리 세 판을 지고 난 후 한동안 그 충격으로 몸져눕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바둑에 있어 평사는 무패의 상승(常勝) 장군이었지만 평사의 삶 자체는 풍랑에 파손된 배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꼴이었다. 상금이나 내기바둑의 배당금으로 밤마다 기방 출입을 일삼으며 술과 여자를 탐닉했다. 하루는 평사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기생과 밤을 지낸 후 느지막이 정 역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랑채에선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날따라 사랑에 드나들던 손꼽히는 고수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고 스님은 그나마 남은 사람들 중에서 고수급에 속하는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스님이 바둑을 두는 것이 약간 이채로워 보였지만 평사는 웃목에 앉아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야！ 그 스님 잘 두네！」 조용하던 방 안이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바둑은 끝났고 스님이 이겼다. 평사는 눈을 감은 채 기척이 없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멎고 스님의 음성이 평사의 귀에 들려 왔다. 「보시오, 시주님. 눈 감고 뭐하시오? 도 닦으시오? 하긴 눈 감고 법열(法悅)에 빠져 보는 것도 큰 낙이지.」 평사가 눈을 뜨고 스님을 본다. 「이보시오, 젊은 양반. 사람들에게 들으니 여기서 당신이 제일 기예가 높다던데 돌중에게 바둑 한 판 시주하시오.」 뭉툭한 주먹코에 얼핏 보아 중답지 않게 생긴 용모였다. 나이는 평사에 비해 예닐곱 살 위로 보였는데 말하는 모양새나 행동거지가 꽤 뻔뻔하게 보였다. 평사가 반응이 없자 스님이 직접 바둑판을 들고 평사 앞으로 다가왔다. 「탁발하는 걸승에게 바둑 한 판 두어 주는 것도 큰 보시요.」 반상 위에는 이미 흑돌 하나가 외목을 점하고 있었다. 평사는 대꾸 없이 바둑판만 내려다본다. 「시주가 바둑을 썩 잘 둔다기에 소승이 흑을 잡았소이다.」 물끄러미 바둑판을 바라보던 평사는 가만히 돌통을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 백돌을 하나 쥐고 우하귀 화점에 부드럽게 착점했다. 스님과 평사의 대국에 흥미를 느낀 구경꾼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스님은 지독한 장고 바둑이었다. 반상에 약 40수가 놓일 때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네 시간이 넘었다. 처음에는 흥미를 가지고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나 지루하게 바둑이 진행되자 하나 둘 그 곁을 떠났다. 대국을 하면서 평사는 스님의 바둑이 꽤 잘 두는 바둑이긴 하나 아직 고수의 반열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지루한 10여 수가 더 두어진 후 스님이 갑자기 돌을 거두었다. 「불사에도 어두운 돌중이 혁(弈:바둑)인들 제대로 알 리가 있겠소이까.」 불과 50여 수의 짧은 대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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