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화와 다시 만난 지 얼마 후 최대포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네 영등포 김 사장 알지?」

김 사장은 최대포와 같은 사기바둑 전주였다. 고수를 몇 명 거느리고 정식 승부도 간혹 벌이는 영등포 일대에서 소문이 난 꾼이었다.

「내 그 새끼 잡아먹어야겠는데. 피차 뱃속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처지라, 방법은 정식 승부밖에 없는데 말야…….」

무슨 열받을 일이 있었는지 최대포가 덤벙댄다. 평소같이 조리 있는 말투가 아니다.

「요번에 말야. 내가 어렵게 어렵게 눈먼 놈 하나 물어 일을 거진 성사시켰는데, 김가 그놈이 낼름 중간에서 가로채 버렸다 이거야. 아무리 아싸리 판이라지만 상도의란 게 있는데 말이지. 그러면서 이러는 거야. 이것 봐,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냐, 억울하거든 제대로 한판 붙든지……. 내 그 건방진 새끼를!」

최대포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다. 잠시 후 겨우 열을 삭인 최대포가,

「저번에도 내가 공들여 잡은 호구를 빼내 간 적이 있었어. 하여간 질이 좋잖은 놈이야. 그래서 말인데, 자네 혹시 그놈 선수하고 정식 승부를 해 볼 생각이 없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믿을 사람이 자네뿐이야. 자네 훈수하는 걸 보면 자네도 예전보다는 실력이 는 게 분명한 것 같고. 허허, 그러고 보니 명색이 전주인 내가 아직 자네 솜씨도 정확히 모르고 있구만.」

하면서 기가 막힌지 허허거리며 웃는다.

「어쨌든 자네라면 정식으로 한번 해 볼 만하다고 보는데…… 어떤가?」

동삼의 잔에 술을 따르며 최대포가 못을 박는다.

「모렐세.」

이틀 후 승부의 현장에서 벌어진 광경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시비는 김 사장이 먼저 걸었다. 여관 천장으로 올라가는 길을 조사하며 온 여관을 들쑤시고 다니더니 그 다음엔  노골적으로 동삼의 몸을 수색했고 그래도 못 미더워 비닐장판을 들추고, 벽에 구멍이라도 없나 샅샅이 살펴보며 방 안을 이 잡듯이 뒤졌다. 혹여 선수들이 마시는 물이나 음료수에 약(수면제, 흥분제 등)이라도 탈까 하여 대국중에는 물 한잔 못 마시도록 조치를 취했다.

가만히 하는 짓거리를 지켜 보던 최대포가 냉소를 지으며 일침을 놓았다.

「이 사람아 ! 고수들의 바둑을 누가 훈수한단 말인가 ! 해 볼 테면 어디 해 보라지 !」

말은 그렇게 했으나 세상엔 숨은 고수가 워낙 많아 최대포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불통시키고 대국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바깥 출입을 삼가시키는 것으로 쌍방 합의를 본 후 대국은 시작됐다.

막상 대국이 시작되자 김 사장의 선수가 워낙에 알아주는 강자인 관계로 최대포는 내심 후회를 했으나 결과는 눈 딱 감고 던진 최대포의 승부수가 적중했다.

그날 바둑에서 최대포는 제법 큰돈을 땄다. 상대 선수도 상당한 수준의 바둑이긴 했으나 초반 포석에 무리를 했고, 중반에 들어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 대마가 잡혔다. 좀더 정확히 말해 김 사장의 선수와 동삼의 기력은 두 점 이상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보이지 않던 최대포가 어느 날 밤 만취가 되어 여관으로 동삼을 찾아왔다.

「한잔 하세.」

최대포는 호주머니에서 술과 안주를 꺼냈다. 술은 미군 피 엑스 뒷구멍에서 흘러나온 고급 위스키였다.

술병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까지 최대포는 말없이 술만 마셨다.

「자네 저번에 이긴 사람이 누군지 아나?」

「…….」

「전문기사에 버금 가는 대단한 고수일세.」

취기로 최대포의 눈이 감길 듯 말 듯한다.

「내 자네 바둑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다시 시작하게.」

「…….」

「사람에게 종말은 한 번뿐이지만 시작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최대포는 마시던 술병을 든 채 그대로 쓰러졌다.

새벽에 동삼이 눈을 떴을 때 최대포의 모습은 없었다.

최대포는 더 이상 동삼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 손 안에 넣은 사람은 절대 놓아 주지 않는다는 최대포가 스스로 동삼을 놓아  준 것이었다.

동삼이 옥화를 다시 찾은 것은 최대포가 동삼의 곁을 떠난 직후였다.

「오늘은 어째 혼자요?」

「…….」

「최대포 그 사람은?」

「……갔소.」

「갈라섰단 말이오?」

동삼이 고개만 끄덕인다.

옥화가 나가더니 가게 문을 걸어 잠근다. 인적이 끊어진 거리는 조용했다. 통금으로 적막한 거리를 야경꾼이 딱딱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갓전등 불빛 아래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옥화가 더듬더듬 초를 찾아 불을 밝힌다. 일렁이는 촛불 따라 두 사람의 얼굴이 흔들린다. 초가 반 넘게 타들어 갈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갈 데가 없소?」

한참 만에 옥화가 물었다.

「갈 데가 없으면 그만 여기서 사시오.」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린다. 옥화가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깔았다. 이부자리는 새것이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자리 위에 몸을 누인 동삼은 참으로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옥화와 같이 산 열 달 남짓한 기간은 동삼이 난생 처음 가져 보는 안락의 시간이었다. 옥화가 장사를 하는 동안 동삼은 방 안에서 혼자 술을 마시거나 바둑을 두었다. 기보도 없이 혼자 두는 바둑을 볼 때마다 옥화는 신기해하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방금 혼자 둔 바둑을 순서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놓을 수 있소?」

지겹지도 않은지 옥화는 매번 똑같은 소리를 했다.

겨울 초입 무렵, 웬 사내가 옥화를 찾아왔다. 마흔이 좀 못 돼 보이는 사내는 한 어린아이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잘 있었는가?」

수염이 듬성듬성한 사내가 히죽이 웃었다. 옥화가 난색을 짓는다.

「어쩐 일이오?」

「열흘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네.」

사내는 주방 쪽으로 가더니 소주 한 병을 가져와 유리컵에 넘치도록 부었다.

「자네랑 잘 살아 보려고 왔네.」

옥화가 동삼의 눈치를 본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하다. 사내가 동삼을 조용히 밖으로 불러낸다.

「저 여자는 내 아이의 엄마요. 형씨가 떠나야겠소.」

사내와 옥화는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났다. 거의 맨몸으로 피난을 온 사내와 사내의 모친은 옥화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수복 이후 고향 오산으로 돌아왔을 때 옥화는 이미 사내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막상 고향으로 돌아오자 사내의 어머니는 태도가 돌변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큰 탈이 없었지만 출산 이후 사내의 모친은 노골적으로 옥화를 구박했다. 옥화는 미련 없이 사내와 헤어졌다.

사내는 가끔씩 옥화를 찾아왔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1년 만의 일이었다.

동삼이 가방을 꾸려 나올 때까지 옥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눈치였다.

「가시오?」

동삼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시오.」

「아니오.」

옥화가 동삼을 따라 나온다. 거리엔 찬바람이 분다.

「이거.」

옥화의 손에 흰 목도리가 들려 있다. 처음 헤어질 때 건네 준 것과 같은 눈처럼 하얀 털목도리다.

「돌아다니다 보면 추울 거요.」

옥화는 목도리를 동삼의 목에 매어 주고 돌아선다. 동삼이 물끄러미 옥화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지난 십수 년의 세월이 일순간에 지나간다.

동삼은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