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젊은이. 나 좀 보세.」

동삼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본다. 어딘지 낯이 익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다.

「자네 혹시 동명관에 있지 않았었나?」

사내는 동삼을 바라본다. 사내는 최성치였다. 일명 최대포. 동명관에서 동삼을 내기바둑에 이용하다가 들통이 난 후 숙향 이모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으며 말뚝처럼 서 있던 사내.

「10년도 더 지난 세월 끝이라 긴가민가 했더니 맞구만. 이젠 헌헌장부가 다 됐네그려.」

「…….」

「아까 기원에서 자넬 봤다네. 혹시나 해서 뒤쫓아 나왔지.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세.」

최대포는 동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명운에게 벽송이 내려진 후 동삼은 도저히 더 이상 도장 생활을 지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도장 생활에 염증을 느낀 동삼은 고가를 떠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인 법고 스님마저 변란중 열반에 들었고 동명관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동삼의 마음을 잡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숙 스승에 대한 마음은 이미 증오로 변해 버렸고 밤이면 괴로운 심정을 달래기 위해 동삼은 술을 마셨다.

「젊은 사람이 핏기가 없어. 술이란 알맞게 마셔야 묘미가 있지.」

급하게 술을 들이켜는 동삼의 잔에 술을 따르며 최대포가 동삼을 타이른다.

「이것 보게 친구. 잡을 수 없는 게 세월인데 자네 같은 솜씨에 잔돈 몇 푼은 너무하질 않은가?」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건드리는 최대포의 기풍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이게 있고 봐야지.」

최대포가 손가락으로 돈을 표시한다.

「날 보게.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온 내가 왜 이렇게 허름한 뒷골목에서 어슬렁거리는 신세가 됐겠나. 정치한답시고 그 많은 재산 다 날려 버린 탓일세. 썩은 정치인들이 판을 치고, 왜놈들에게 빌붙어먹던 놈들은 위세당당하게 큰소리 치는데 뛰어난 경륜으로 한 세월 살아온 이 천하의 최대포가 이리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세월 탓이고, 돈 탓일세.」

최대포의 말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동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꾸를 아니한다. 최대포가 슬슬 본론을 끄집어낸다.

「아까 얼핏 보니까 자네 솜씨가 여전하더구만. 자네 같은 솜씨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네.」

동삼은 대꾸 없이 계속 술만 마신다.

「어떤가, 내가 자네 솜씨를 사겠네.」

동삼을 은근히 구슬린다.

「솜씨란 흘러가 버리면 그만이야. 그나마 살아 있을 때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지.」

최대포가 제의해 온 것은 사기바둑이었다. 일을 꾸미고 성사시키는 것은 최대포가 하고 동삼이 할 일은 훈수가 필요할 때 착수 지점을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
착수 지점을 전달하는 방법으로는 일본에서 넘어온 쿠사리빵의 일종으로 중간 연락책을 이용하여 수를 전달했다. 연락책이 대국실과 훈수꾼이 있는 곳을 오가며 수를 받아넘기는 방식인데 연락책은 거의 최대포가 맡았다.

훈수의 양이 많아지면 훈수꾼을 과감하게 대국실 주위로 침투시켰다. 최대포는 주로 천장을 이용했다. 미리 대국 장소를 물색한 뒤 천장으로 올라가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수법을 가장 즐겨 썼다. 그때는 신호판을 선수의 팔에 몰래 부착시켜 천장에서 신호를 하면 착수 지점이 선수의 팔을 통해 전달이 되도록 했다.

건물 구조상 도저히 천장을 이용할 수 없을 때는 훈수꾼을 구경꾼으로 가장하거나, 그도 저도 어려울 때는 옆방에서 바둑판을 훔쳐볼 수 있게 만들었다.

착수 지점은 달력의 숫자에 꼬마전구를 연결시켜 놓고 훈수꾼이 바둑판을 훔쳐보며 보턴을 누르면 상대의 등뒤로 불이 들어온다거나 장판 밑으로 줄을 이어 선수의 발가락에 연결시키는 등의 재래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동삼은 최대포가 주선하는 사기바둑을 이기게 하는 대가로 술과 여자라는 쾌락을 제공받았다.

최대포는 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기꾼은 분명 사기꾼인데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안목이 꽤 높았고, 그의 말마따나 비록 정상적인 길은 아니었지만 경륜 또한 만만찮아 보였다. 거기다가 말투와 행동거지는 일류 신사였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모모 인사를 팔면서, 때로는 그 사람의 후광을 등에 업기도 하고 때로는 이용당한 후 버려진 배신의 쓰라림을 이야기하며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래서인지 술집에서 장광설을 풀면 여자들이 곧잘 넘어갔다.

아무도 최대포가 사기바둑으로 남의 등이나 치는 사람이라곤 짐작을 못했다.

꼭 한 번 술에 취해 동삼이 기거하는 여관으로 찾아와 속마음을 비슷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긴 했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정 붙인 것 중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건 바둑밖에 없더군. 그래서 이 짓을 계속하는 거야. 한 밑천 건져 장사라도 해 볼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만 다 그만뒀네. 한 세상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사기바둑에 손대는 건 그나마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징표라고나 할까.」

최대포는 그렇게 말하며 어설프게 웃었다. 등 치고 간 빼먹는 최대포, 이젠 나이를 속일 수 없는지 눈가에 주름이 잡힌 그 얼굴을 보면서 동삼은 어처구니없게도 최대포의 얼굴이 참 맑다는 생각을 했다.

「자네 동명관의 옥화라고 기억하고 있나?」

뜬금없이 동명관 이야기가 최대포의 입에서 나온다.

「그애가 얼마 전에 술집을 차렸다네. 요정은 아니고 싸구려 선술집인데 그 아이의 인물이 좋은 탓인지 손님이 꽤 많더구만.」

옥화의 얼굴이 떠오른다. 헤어질 때 하얀 털목도리를 주었던 여자.

「말 나온 김에 그애 집으로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옥화의 선술집은 경동시장 못 미쳐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행길가에 있었다. 누추하게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술집 안은 깨끗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최대포에게 인사를 하다 말고 옥화와 동삼의 눈이 딱 마주쳤다. 옥화의 낯빛이 변했다.

「10년이 넘었군요.」

「그렇소.」

옥화가 주방에서 새로 내온 술을 동삼의 잔에 한잔 부었다.

옛날 동명관에서 자신에게 앙탈을 부리던 여자.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미움이 아니었다. 여리고 곱던 얼굴이 무척이나 메말라 있었다. 그녀에게도 세월은 흘렀던 것이다.

「나 많이 변했지요.」

옥화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아니오.」

「빈말이라도 듣기가 좋소.」

「……숙향 이모는 어떻게 됐소?」

옥화의 미간에 그늘이 진다. 커다란 눈이 금세 붉어진다.

「어머니는 피난중에 폭격을 당했소…….」

배에 파편이 박혀 출혈이 심한 숙향의 안색은 창백했다. 몹시 고통스러울 텐데 숙향은 웃었다. 화상을 입어 얼굴 한쪽이 부풀어오른 옥화를 보며 숙향이 말했다.

「큰일이다. 기생은 얼굴이 밥줄인데…….」

「어머니 걱정이나 하시오.」

「이년아, 나야 죽어 버리면 이것 저것 다 잊어버릴 것 아니냐. 살아 남은 네년 앞길이 걱정이지.」

「죽는 것보단 낫소.」

「이년아. 죽는 것보다 못한 팔자도 많은 법이다……. 한때는 어렵기도 했지만 살아 생전 온갖 영화 다 누려 봤고…… 이젠 원도 한도 없다.」

옥화의 눈에 눈물이 어린다.

「정 붙일 곳 없는 세상. 이제 죽어 화정이도 만나고…… 동삼이는 어찌 됐을꼬.」

「……. 」

「옥화 네년이 동삼이를 좋아했지.」

「어머니, 별 말씀 다 하오. 이젠 다 잊어버렸소.」

「이년아, 첫남자는 평생 못 잊는 법이다.」

「어머니도 그렇수?」

숙향의 얼굴에 화색이 조금 돌았다.

「이젠 기억에도 없다.」

언제나 엄격해서 무섭기만 했던 숙향에게서 옥화는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느낀다.

숙향의 눈꺼풀이 힘없이 감긴다. 심지가 가물가물한다. 눈물을 흘리는 옥화를 보며,

「이년아, 울지 마라. 팔자 사나워진다.」

숙향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방에는 총소리, 대포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 소리, 소리…… 생지옥이다.

「어머니 잘 가시오.」

시체를 묻지도 못하고 옥화는 피난길을 서둘렀다.

동삼이 따라 주는 술 한잔을 비우며 옥화가 물었다.

「그때 그 목도리 아직도 가지고 있소?」

「…….」

난리 통에 목도리는 잊어버리고 없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그날 밤 세 사람은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