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운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은 감고 있는데 정신은 초롱초롱하다. 머리 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진다. 복잡한 상념을 뚫고 바둑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낮에 동삼과 두었던 바둑이다.

아카기가 눈물을 뿌리며 돌아간 지도 벌써 몇 개월이 흘렀다. 그 후 동삼은 다시 강원에 합류했다. 그 동안 동삼과 명운은 여러 번 대국을 가졌는데 명운은 간신히 한 판을 이겼을 뿐이었다. 1승 11패. 참혹한 전적이었다.

동삼과 대국할 때마다 명운은 그가 과연 몇 년 전 자신에게 두 점을 놓았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명운이 고집스럽게 호선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치수는 변동이 없었지만, 솔직히 선으로도 장담키 어렵다는 게 주변의 따가운 시각이었다.

김원준과 장승표는 노골적으로 동삼의 수하라도 되듯 졸졸 따라다녔고, 해학에 밝은 박갑수도 동삼을 대할 때면 왠지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이 동삼을 대하는, 거의 흠모에 가까운 시선을 볼 적마다 명운의 가슴은 찢어질 듯 쓰라렸다.

어릴 적 철없는 경쟁심으로 한때 동삼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준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명운은 그 일에 대해 많은 후회를 했었다. 그러나 그 후회의 이면은 엄밀히 말하면 가진 자의 못 가진 자에 대한 너그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황당스러운 열패감을 어쩌란 말이냐. 이대로 끝없이 이곳에서 동삼의 뒤만 바라보며 허겁지겁 쫓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안 돼! 그럴 순 없다.

명운은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다. 어릴 적부터 온갖 찬사를 받고 살아왔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명운은 자신이 이곳으로 오기 전 서울에서 바둑협회가 창립되고 전문기사 제도를 육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집단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동삼을 꺾을 수 있는 길이 보일지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에 명운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좌불안석으로 방 안을 맴돌던 명운은 급한 마음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한다.

‘일단 서울로 가 보자.’

마음을 굳힌 명운은 스승을 찾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자정이 되기 전에 스승의 방에는 불이 꺼지는 법이 없었다.

「스승님.」

방에서 스승의 응답이 온다.

「들어오너라.」

스승은 화선지 위에 난을 치고 있었다. 명운은 무릎을 꿇고 스승의 묵화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허리를 쭉 편 대범한 앉음새로 거침없이 난잎을 어우르는 스승을 보며 명운은 스승이야말로 예인의 품격이 몸에 배인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윽고 스승의 붓이 거두어진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날이 밝는 대로 서울을 한번 다녀왔으면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설숙은 깊숙이 명운을 응시한다. 최근 들어 동삼과의 승부로 갈등하던 명운의 푹 꺼진 눈자위가 성큼 들어온다. 설숙은 아무 내색 없이 그 청을 들어 준다.

「다녀오너라.」

설숙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운이 설숙에게 절을 올린다. 더 이상 아무런 설명 없이 방을 나서는 명운의 뒷모습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화약같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설숙은 불을 끈다. 새벽이 되어서야 설숙은 잠자리에 들었다.

명운이 도장을 떠나 다시 돌아온 것은 달포 만인 늦여름이었다.

도장에 도착하자마자 스승의 방에 든 명운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스승님. 지금 서울에는 한일기원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왜인들의 일본기원처럼 말이냐?」

「이제까지 이름만 접하던 많은 국수들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설숙은 읽고 있던 서책을 덮는다.

「어차피 바둑에 일생을 걸기로 맹세했던 몸입니다. 그곳에서 평생 기도를 연마하며 살고 싶습니다.」

「…….」

「허락해 주십시오.」

한동안 듣고만 있던 설숙이 말문을 연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설숙은 지금까지 자신의 곁을 떠나겠다는 제자를 한 번도 막아 본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잠시 후, 동삼을 포함한 전 문하생들이 스승의 방에 모였다. 설숙은 우선 간략하게 명운의 뜻을 전한다. 명운의 거취에 대해 말을 마친 직후 설숙이 동삼에게 지시한다.

「가서 벽송을 가져오너라.」

동삼은 스승의 갑작스런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명운이 떠나는 마당에 난데없이 벽송을 가져오라니.

「무얼 하고 있느냐. 벽송을 가져오라 하지 않았느냐!」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는 동삼은 제정신이 아니다.

왜 벽송을 가져오라는 것일까…… 설마…….

이미 명운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누구보다도 스승이 그걸 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아직 기력이 정정하신 스승님이 아닌가.

동삼이 벽송을 가져와 설숙 앞에 놓는다. 설숙은 한동안 감회 어린 눈으로 벽송을 바라본다.

「이 벽송은 나의 스승이신 여목 스승께서 당신의 뜻과 유지를 전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내리신 것이다……. 명운이는 이번 서울 가는 길에 이 벽송을 가져가거라.」

순간 동삼의 얼굴에 핏발이 선다.

「내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 기반은 누대에 걸쳐 숱한 명인들의 숨결이 어리어 있는 것이다. 이 벽송의 주인으로서 부디 대성하여 후세에 길이 남는 명인이 되어라.」

호롱불이 아른아른 흔들린다. 스승의 말이 먼 곳에서 들린다. 동삼의 몸이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다.

왜 내가 아니고 명운이어야 한단 말인가…… 왜 추씨 일문은 벽송의 주인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명인의 재목으로 부족해서……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단 말인가.

동삼의 가슴이 절규한다.

「스승님의 그 말씀 평생을 두고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명운이 스승 앞에 부복해 머리를 조아린다. 그의 눈에서 감격에 찬 눈물이 흘러내린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살아왔던가. 그 얼마나 많은 밤을 벽송의 주인이 되고자 지새웠던가.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눈물을 흘리며 명운이 벽송의 반면에 덮여 있는 삼베보를 걷어 낸다. 생명이 살아 숨쉬는 신비한 나무색의 반면이 밝은 호롱불 밑에서 그 찬연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벽송이 정 국수님의 손에 들어갔군요. 그런데 몇 가지 의문 나는 점이 있습니다. 정 국수님은 저에게 분명히 이 바둑판의 주인은 추동삼씨라 했습니다. 정 국수님은 왜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추동삼씨에게 바둑판을 돌려 주라고 했을까요? 또 당연히 추동삼씨에게 물려줘야 할 바둑판을 설숙 선생께서는 왜 굳이 정 국수님에게 넘겨 주었을까요?」

정 국수에게 부탁을 받으면서 줄곧 가졌던 벽송에 대한 의문이었다. 해봉처사는 한동안 묵상에 잠기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보기엔 몇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있네. 우선 설숙 스승님의 입장을 정리해 보지. 스승님은 여목 대스승으로부터 벽송을 물려받음으로써 평생 그 기(氣)에 눌려 진정한 대자유인이 되지 못했네. 일종의 부담감이라고나 할까……. 물론 추평사라는 걸출한 천재가 있었던 탓도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건 배제되어야 할 문제네. 스승님은 그 굴레를 동삼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게야.」

「…….」

「또한 스승께서는 그 일을 계기로 동삼에게 떠나기를 종용했다네.」

「왜 추동삼씨를 도장에서 내보내려 했습니까?」

「스승은 동삼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만약 그런 극약처방이 없었다면 동삼은 결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게야. 스승님은 동삼의 그런 기질을 잘 알고 있었지……. 스승님은 동삼이 그곳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랐네. 그래서 보다 진정한 명인,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길 바랐다네.」

「그러나 추동삼씨 입장에선 너무나 가혹한 처사가 아닙니까?」

「어쨌든 스승님의 뜻은 그랬을 것이네. 벽송을 정 국수에게 준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그것이네. 정 국수도 말년에야 그걸 깨닫고 자네를 통해 벽송을 동삼에게 돌려 주려 한 것이지.」

박 화백은 조금씩 혼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하필 그 시점에서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또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설숙 선생은 추동삼씨의 바둑을 위한 희생양으로 정 국수님을 택했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네. 명운에게는 긍지를 심어 주자는 측면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지. 누가 뭐래도 명운은 스승님의 자랑스런 제자였으니까…….」

「처사님은 추동삼씨에 대한 설숙 스승의 마음을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해봉처사가 빙긋이 웃었다.

「사람이 서로 한솥밥을 먹고 살다 보면 마음이 와 닿는 법이지. 동삼이 떠나고 스승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이 나였네.」

「그랬군요.」

박 화백은 눈앞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참으로 불가해한 스승과 제자였다.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설숙의 고고한 자태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