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숙도장 문하생들은 승리의 기쁨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박갑수는 노골적으로 흰 이를 드러내 놓고 웃었고, 김원준은 앉았다 일어섰다 어쩔 줄을 모른다. 눈치 없는 장승표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장하십니다.」

장승표의 그 말에 승부에서 패한 시마즈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다.

명운은 쓸쓸히 방문을 나섰다. 동삼의 승리가 같은 동문으로서 응당 기뻐해야 할 입장이었으나 그토록 승리를 염원했던 자신은 도대체 그 동안 무얼 하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이 온통 자신을 짓눌렀다.

돌을 갈라 통 속에 쓸어 담는 동삼을 보며 아카기가 말했다.

「길게 갈 것도 없이 내일 당장 대국을 시작합시다!」

「약속과는 틀리지 않소.」

박갑수가 아카기를 제지한다. 아카기는 막무가내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

「애초부터 이 사람을 언급했던 적은 없소.」

박갑수가 막 반박을 하려는 찰나, 동삼이 나섰다.

「좋소.」

동삼의 서슴없는 태도에 아카기는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카기는 어쩐지 동삼에게 선수를 뺏긴 기분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홉 시부터 대국이 시작되었다. 흑백을 가리자 이번엔 동삼이 흑, 아카기가 백이었다.

시작부터 대국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대국 벽두부터 아카기는 니뽄도를 꺼내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니뽄도의 예리한 날을 동삼의 목을 베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반상 곳곳에서 선혈이 난무했다.

차세대를 대표하는 일본의 선두주자 아카기의 기력은 확실히 돋보이는 바 있었다. 시마즈와는 분명 격이 다른 예리한 수읽기와 냉철한 형세 판단을 겸비한 초일류 급의 기사였다. 그의 괴력이 반상 위를 우박처럼 두들겼다.

동삼은 아카기가 손 빼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울퉁불퉁한 벽면에 던진 공처럼 도저히 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기풍이었다.

파랗게 날이 선 아카기의 장검은 동삼의 흑진에 조그만 틈새만 보여도 비집고 들어왔다. 동삼은 수없이 장고를 거듭하며 아카기의 탁월한 공세를 피해 갔다.

대국을 시작한 지 이틀째. 동삼과 아카기의 몸은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땀으로 온통 축축이 젖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동삼과 아카기의 대국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아카기와 동삼의 대국은 진정한 고수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틀째 접어들면서 아카기는 나름대로 동삼의 바둑을 분석해 본다.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건 시마즈와의 대결에서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동삼의 바둑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무너지지 않고, 이젠 어느 정도 됐겠지 싶어 반상을 돌아보면 승부는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뚜렷이 강점도 없으면서 약점도 잘 노출되지 않는다. 허약해서 들어가 보면 의외로 튼튼했고 느린 것 같아 건드려 보면 민첩하기가 그지없다. 게다가 운석의 형태가 모호하다. 사람 자체도 알 수 없는 작자다.

바둑은 중반을 지나 계가를 해 보니 흑은 삼귀생에 좌변 중앙에 10여 집 해서 약 60여 집, 백은 한 귀와 하변에서 중앙에 이르는 대가, 우변에 칠팔 목까지 합치면 56~57호 정도. 형세는 극미했다.

무려 세 시간의 장고 끝에 아카기는 좌변 흑말을 공략했다. 승기를 잡기 위해 아카기는 안간힘을 다한다.

대국 사흘째. 바둑은 이제 어느 정도 소강 상태로 접어들어 있었다. 아카기의 판단이 주효했는지 미세하나마 바둑은 아카기가 집으로 유리했다. 동삼의 두터움이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종반으로 치닫는 바둑은 아무래도 덤이 안 나오는 바둑이었다.

동삼의 장고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아카기는 아카기 나름대로 동삼의 다음 착수를 기다려 차후의 변화를 미리 헤아린다.

그때였다. 대국장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설숙이 슬며시 대국장에 들어섰다. 동삼과 아카기는 수를 읽느라고 정신이 없어 몰랐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참으로 이례적인 스승의 방문이었다.

20일을 넘긴 대국 기간 동안 스승은 부쩍 늙어 보였다. 항상 말끔하던 얼굴이 부석부석해진 것 같았고, 그렇게 보아 그런지 귀밑머리도 많이 희어진 것 같았다. 최해수는 스승의 그런 모습을 대하기가 민망하고 송구스러웠다.

‘세상에…… 얼마나 승부의 추이가 궁금했으면 스승께서 직접 이 자리에…….’

최해수의 콧날이 시큰거렸다. 스승의 깊은 속마음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절절히 와 닿았다.

설숙은 잠시 동안 반상을 내려다보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동삼은 스승이 다녀간 줄도 모르고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 깊은 장고에 빠져 있었다.
동삼은 아카기의 중앙 대마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동삼이 아카기의 중앙 대마를 겨냥하고 있으리라고는 대국실 안의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카기의 대마는 워낙 넓게 퍼져 있었고 군데군데 안형의 그림자가 있어 그 대마를 잡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동삼은 그 대마를 잡기 위해서 완벽한 수읽기를 하고 있었다.

장고 세 시간째, 희미하게만 보이던 대마의 꼬리가 조금씩 손에 잡혀 들어왔다. 동삼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가슴이 떨리고 맥박이 뛴다.

뭔가가 보인다. 뚜렷치 않으나 대마의 진위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먼 곳으로부터 승부가 다가오기 시작하고 동삼은 주체할 수 없이 승부에 젖어 든다. 그때 반상 너머 장막을 헤치고 홀연히 스승이 나타난다. 스승은 찬연한 빛무리를 후광처럼 두르고 있었다.

「마음을 놓치면 형세를 잃게 되고, 사심(邪心)이 있으면 맥을 짚을 수가 없다. 마음을 붙들어라…… 마음을…… 마음을…….」

장고 네 시간째. 그토록 요동치며 실체를 숨겨 왔던 대마의 모습이 비늘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후 한나절 장고 끝에 해가 기울면서 동삼의 손이 돌통으로 향했다. 동삼은 마지막으로 떨리는 가슴을 주저앉히고 뛰는 맥박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돌을 들어 한 수 착점하자 비로소 아카기가 동삼의 의도를 눈치 채고 불같이 노한다.

‘이놈이 내 대마를 잡겠단 말인가.’

동삼의 뜻이 대마에 있다는 게 드러나자 정명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동삼의 대범한 발상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저 친구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명운은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해 온 동삼의 기풍과는 또 다른 일면을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명운의 마음속에서 엄청난 상실감이 고개를 든다.

이번에는 아카기의 장고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 시간…… 두 시간…….

판을 세밀히 살펴보니 의외로 간단치 않다. 대마가 사는 건 문제가 아니다. 잘못하면 한쪽을 떼 줘야 하는데 그것이 거의 10여 집을 상회했다. 그렇게 되면 집으로 역전이었고 뿐만 아니라 바둑의 내용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승부처를 찾기도 만만찮았다. 당연히 그런 수순을 밟을 리 없는 아카기는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며 대마 전체의 수습에 나섰다.

세 시간이 넘는 장고 끝에 아카기의 착수가 반상에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연이은 동삼의 추궁이 아카기의 심장을 바로 찔렀다.

‘이놈이! 이 난해한 대마에 대해 이미 수읽기를 끝내 놓았단 말인가!’

아카기의 눈이 붉게 충혈된다. 또다시 아카기의 대 장고가 시작되었다.

대국 나흘째 밤. 시간을 물 쓰듯 하며 장고를 거듭하는 아카기의 몸부림도 점차 기력을 상실해 갔다. 그토록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아카기의 대마가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동삼의 수읽기는 완벽했다. 그 완벽한 수읽기를 보며 명운과 최해수는 전율했다.

새벽 네 시. 설마 했던 백대마의 죽음이 적나라하게 바둑판 위에 드러났다. 장장 나흘간에 걸친 처절한 사투에서 마침내 아카기의 대마가 몰살했다. 아카기는 혼이 빠져 실성한 사람처럼 바둑판 앞에서 비실비실 웃는다.

잠시 후 아카기가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난다. 김재석과 시마즈가 양쪽에서 아카기를 부축한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최해수는 동삼이 저번 시마즈를 이겼을 때처럼 앞뒤 돌아볼 사이도 없이 냅다 안채를 향해 달려갔다. 새벽녘이라 하나 겨울철이어서인지 아직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스승의 방은 불이 켜져 있었다.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로 보아 스승은 앉아 계실 것인데 기척이 없다. 최해수는 방 앞에서 스승을 불렀다.

「스승님!」

최해수는 격한 감정을 누르며 낭보를 스승에게 전한다.

「스승님! 동삼이 이겼습니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때 동삼이 지친 몸을 이끌고 안채에 나타났다. 나흘 밤낮으로 대국에 시달린 동삼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동삼은 스승의 방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계속 기척이 없다.

「스승님, 동삼이 왔습니다.」

최해수가 동삼이 왔음을 고한다. 그제서야 방 안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어라.」

그 소리와 더불어 스승의 방에 불이 꺼진다.

탈진한 동삼이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최해수가 동삼을 쓸어 안았다. 동삼의 눈에 눈물이 아련히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