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제안에 동삼이 흥분한다. 혼자서 공부해 오긴 했으나 실전대국을 해본 지가 1년이 훨씬 넘었다. 조규옹의 수제자라면 그 실력은 불문가지, 동삼으로서는 횡재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침착했지만 돌아서서 가는 동삼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게 얼마 만의 대국인가. 그러니까 1년도 더 된 부산 피난 시절, 최해수와 선으로 두 판의 바둑을 둔 이래 처음이 아닌가.

그때 동삼과 최해수는 1승씩 나누어 가졌다. 그 직후 최해수는 자원 입대를 했고…….

「제가 몇 점을 놓으면 되겠습니까?」

마주 앉아 동삼이 묻는다.

「알아서 놓게.」

「그럼 흑을 쥐고 선으로 한번 두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게.」

동삼은 처음부터 판을 신중하게 짜 나갔다.

사실 동삼은 흑을 쥐고 선으로 두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실력이 다소간 늘어 동삼은 혼자의 추측이긴 했으나 정명운에게도 이젠 흑으로 두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스승의 기력은 알 수 없으되 이제까지 만나 본 최고의 바둑은 명운이었다.

평소 동삼은 명운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아무리 이재사가 호남 국수라지만 기껏해야 명운과 비슷한 수준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동삼의 계산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이재사의 바둑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세력과 실리가 적절히 조화된 물샐틈없는 바둑을 구사했다. 명운보다는 윗길이라는 판단이 확연히 든다. 행마의 감각이 명운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물 흐르듯이 유연한 바둑이었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긴 했으나 동삼은 역부족인 걸 절감한다.

해거름에 시작한 바둑이 새벽 한 시가 가까워서 끝이 났다. 동삼이 돌을 던졌다.

완벽하게 밀린 한 판이었다. 돌을 쓸어 담으며 이재사가 말했다.

「자네 설숙 선생 밑에서 몇 년을 배웠나?」

동삼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입문한 지는 8년 됩니다만 실제로 수습한 기간은 2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래?」

이재사의 고개가 갸웃하더니 말끝이 묘하게 감긴다. 감탄을 하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호한 어투다.

「나에게도 자네만한 제자가 한 명 있네.」

「…….」

「김헌자라는 아이인데 명인의 재목이지. 기억해 두게.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걸세.」

김헌자. 동삼은 무심코 흘려 들었지만 김헌자는 후일 동삼에게 패한 후 상당한 친분을 맺게 된다.

그날 밤. 동삼은 새벽이 가까워 오도록 이재사와 둔 바둑을 복기 검토했다.

여러 각도로 수순을 검토해 봤으나 이미 이재사의 바둑은 자신이 넘볼 그런 바둑이 아니었다.

행마의 형태가 뚜렷했고 대목대목마다 일목요연하게 답을 내려 주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밤이 되어서야 설숙 스승이 돌아왔다.

이재사는 스승과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대뜸 스승에게 시비투로 나왔다.

동삼에게 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작금의 국수 계보에 문제가 있소이다.」

이재사의 눈에는 흡사 광기와 같은 빛이 어린다.

「임춘강, 이기명, 하재순, 이들 이름은 선생께서도 익히 아실 거외다.」

「들은 바 있소.」

「그들뿐 아니외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무수한 사람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소이다.

허나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이 나라의 국수임을 부정했소. 바로 선생이 있기 때문이었소. 그들은 여목 어른의 제자라는 그 한 가지 사실로 선생을 추켜세웠소. 선생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이 말이외다.」

「…….」

「여목 어른이 조선 바둑의 대들보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그로 인해 후대의 국수를 놓고 형평성이 무너져서야 되겠소? 바둑은 엄연히 승부이거늘, 그리고 선대의 일은 선대의 일일 뿐, 당금의 현실은 현실인 것이오.」

비수를 들이대듯 이재사는 선대의 일을 언급한다.

이재사의 망막 깊숙한 곳에는 스승 조규옹의 마지막 모습이 단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듣거라.」

죽음 앞에서도 조규옹은 의연했다. 부복한 이재사의 눈에 눈물이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여목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조선의 국수다. 나는 그분을 두려워하면서도 항상 존경해 왔다. 설사 노구의 그분을 이겼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야. 실로 아쉬운 점은 그분이 타계함으로써 조선 바둑은 대들보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분이 없는 조선 바둑에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그래서 나는 이곳으로 낙향했느니라. 내 시대는 여기서 끝이 났다. 훗날 너는 대통을 이어받아 조선의 명인이 되어라.」

「스승님!」

조규옹은 죽는 순간까지 이재사를 걱정했다. 혈혈단신 떠돌이 소년을 거두어 재사라는 이름까지 지어 준 노 기객 조규옹은 그렇게 갔다.

이재사의 뜻은 확고했다. 노쇠한 여목을 상대로도 한 판밖에 이기지 못한 조규옹의 한이 이재사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설숙을 꺾음으로써 스승이 뜻한 바는 아닐지 몰라도 제자가 된 도리로 스승의 한도 풀고, 자신은 명실상부한 국수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조용히 이재사를 응시하던 설숙이 단호하게 말한다.

「돌아가시오.」

분위기가 딱딱해진다.

「돌아가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내 실력이 모자란다는 뜻이오, 국수의 자리가 불가하다는 뜻이오?」

이재사가 노골적으로 나온다. 설숙은 바위처럼 꿈쩍도 않는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가르며 이재사의 말이 이어진다.

「좋소이다. 그렇다면 한 바둑인으로서 선생에게 승부를 청하오.」

한참 만에 설숙이 입을 뗀다.

「당신의 제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

「무슨 말이오? 그냥 한 바둑인으로서 승부를 청한다 하질 않소!」

「…….」

「설마 하니 이 나라 국수께서 이 이재사가 두려워서 피하는 건 아닐 터!」

이재사가 슬쩍 변죽을 울린다.

「하긴 제자의 실력을 보니 선생이 피하는 뜻을 전혀 짐작 못할 바도 아니나…….」

처음으로 설숙의 눈에 날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