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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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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산구비를 관솔불 하나에 의지해 겨우겨우 밤길을 가듯 막막하기만 했던 겨울이 힘들게 지나갔다. 악몽처럼 기나긴 봄날 춘궁기도 어렵사리 고비를 돌았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깊어지자 몸을 사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탓인지 부족하나마 다시 들이닥친 겨울을 넘길 차비는 간신히 마련되었다.
봉화에 내려온 지 1년이 지난 것이다. 그 1년 동안 시봉할 사람 하나 없고 찾아오는 이마저 드문 고적한 집에서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고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호남 국수 이재사(李栽査). 그의 방문은 설숙과 동삼 두 사람 사이에 일대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령의 노사초가 맨발로 쫒아 나와 맞이했다던 이재사. 노사초는 이재사의 호쾌하고 청명한 바둑을 좋아했다. 십 수살이 아래인 이재사에게 늘상 힘 한번 못 쓰고 당하면서도 이재사가 찾아오는 날은 어김없이 수담으로 밤을 새웠다. 한번은 사초가 이재사에게 말했다.
「여보게 재사 이치(理致)가 있다고는 하나 바둑만 하겠는가?」
재사가 그 물음에 답하길
「사초선생님 보다 중한 건 길흉화복이 아닐는지요.」
사초가 대소했다.
「과연 승부사로고!」
해방되던 해. 봄. 사초는 죽었다. 몰판으로 이긴 바둑을 天無盡殺之理(하늘의 이치가 다 죽이는 법은 없다.)라 하여 상대방의 대마를 살려주던, 기객이라기보다는 사초는 풍류객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해초(海樵) 유진하(柳鎭河) 국수가 사초의 상여가 떠나는 날. 固一世之善棋 而今安在哉 (진실로 한 시대의 용한 바둑이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만장에 글을 써서 상여의 뒤에 걸었다.
재사는 사초선생의 상여를 메고 눈물을 머금은 채 맨발로 장지까지 갔다. 스승이 죽고 사초는 재사에게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날은 설숙이 10리나 떨어진 옛 본가 마을로 출타를 한 다음날이었다. 옛날에 비할 순 없지만 누대에 걸쳐 쌓아 올린 명문 거족의 영향력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가끔씩 옛 마을 유지들과 어울리기도 했던 설숙은 그날도 본가 마을 한 유지의 초대를 받고 출타중이었다.
한번 출타하면 스승은 통상 사나흘 만에 돌아왔다. 전날 오후 느지막이 나갔던 스승은 다음날 정오가 넘어도 돌아올 줄 몰랐다. 동삼은 살그머니 스승의 방으로 건너갔다. 피난통에 일부 유실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서책과 기보들은 옛날처럼 서재에 정리되어 있었다. 벽송 또한 서재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 난리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스승 곁을 떠나지 아니했던 벽송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삼베보에 싸여 있었다.
동삼은 가만히 삼베보를 걷었다. 오랜만에 반면을 드러낸 벽송은 변함없이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벽송의 반면이었다. 600년 비자의 촘촘한 빗살무늬가 황홀하기까지 했다. 홍임보(本因坊)가에 내려오다, 망명중이던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유실되었다는 전설의 부목반(浮木盤)이 가당키나 하랴 싶었다.
동삼은 대담하게도 벽송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스승에 대한 미묘한 갈등으로 감히 상상도 못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삼은 여목 대스승과 위지손의 기보를 찾아서 가지고 나왔다. 그 기보는 미완성의 바둑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특별한 연유가 있었음인지 설숙 스승이 여간해서 유출시키지 않는 기보였다.
동삼은 기보에 따라 복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수 한 수 반상 위에 돌을 놓으며 동삼은 점차 여목 스승의 바둑에 매료되어 갔다. 여목 스승의 대지를 질타하는 그 웅장한 바둑을 접하며 동삼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가슴을 차고 오르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에 동삼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황홀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 마리 대붕이 되어 거대한 나래를 펴고 하늘로 치솟아 까마득한 구름 위를 날아가는 위대한 여목 스승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기보의 마지막 수인 무형(無形)의 수를 착수하며 동삼은 아버지 추평사 생각에 목이 메인다.
「네 아버지는 여목 선생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다.」
정 노인의 말이 불현듯 가슴을 친다. 바둑판 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목 스승의 얼굴이 그려지고 아버지 평사의 초췌한 모습이 새겨진다.
「실례하겠소이다.」
삽짝 밖에서 생소한 음성이 들린다. 동삼은 일순 당황한다. 제풀에 놀란 동삼은 허둥지둥 벽송을 들고 나와 스승의 방에 갖다 놓았다. 식은땀이 주루룩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구십니까?」
삽짝 밖에는 중후해 보이는 한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단정한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얼굴이 기다란 사람이었는데 눈이 표범같이 날카롭게 찢어져 있었다.
「여기 설숙 선생이라고 계시오?」
「지금 출타중이십니다.」
「그러시오.」
사내는 삽짝문을 밀고 들어섰다. 제 집을 찾아온 듯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찾아오긴 바로 찾아온 모양이군.」
사내가 대청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분의 제자 되시오?」
「그렇습니다.」
사내는 마당을 휘 둘러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설숙 선생을 만나러 왔네.」
사내는 거침없이 반말이다.
「언제 돌아오시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지.」
사내의 행동거지로 보아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며칠이라도 기다릴 태세다. 저녁 밥상을 물리면서 사내가 한숨을 쉰다.
「조선 국수 생활이 말이 아니군.」
「…….」
「이보게 젊은이, 내가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나 호남의 이재사일세.」
이재사? 그러고 보니 언젠가 최해수 형에게서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이재사는 여목 스승에게 유일하게 한 판을 이긴 일이 있는 호남 국수 조규옹(趙圭雍)의 제자였다. 당시 조규옹은 40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고 여목 스승은 60이 넘은 나이로 노쇠해 있었다. 세 판을 두어 한 판을 이겼는데 그걸 두고 한때는 세간이 떠들썩했다. 일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목 스승의 시대가 가고 이제 조규옹의 시대가 찬란히 열릴 것이라고까지 했다.
여목 스승이 타계한 후, 조규옹은 하늘을 보고 한탄하며 틀어 올린 상투를 자르고 눈물을 흘리며 전주(全州)로 내려가 칩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호남 국수 조규옹,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길러 낸 수제자가 바로 이재사였다.
「자네 동설 선생 소식은 아는가?」
별안간 이재사가 동설 선생을 거론한다. 동설 선생이라면 한때는 설숙 스승과 쌍벽을 이루었던 여목도장의 기둥이자 빼어난 기량을 지닌 감각의 달인이 아니던가.
「아는 바 없습니다.」
「그러신가.」
혼잣말하듯 이재사가 중얼거린다.
「난리통 때문인지 사람들의 안부는 알 수 없고…….」
밤이 늦어 가건만 설숙 스승은 돌아올 기척이 전혀 없다.
「자네 바둑판 가져와 보게.」
이재사의 말에 동삼이 어리둥절해한다.
「기다리기 무료하니 우리 바둑이나 한판 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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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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