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에 비해 연배인 다카하시가 자세를 고쳐 잡고 돌을 한움큼 쥐었다. 다카하시의 떨리는 손을 보며 평사는 가만히 흑돌 하나를 반상 위에 올려 놓았다. 돌을 가르자 홀수로 평사의 흑번이었다.

평사가 놓은 첫 수는 우상귀 소목(귀의 제3선과 제4선의 교차점)이었다. 다카하시의 다음 수는 좌상귀 소목, 평사의 다음 수는 우하귀 소목이었고 다카하시는 바로 우상귀에 날일자로 걸쳐 왔다. 평사가 손을 빼고 좌하귀 소목에 착수함으로써 바야흐로 1· 3· 5 포석이 전개됐다.

평사는 별 생각 없이 슈샤쿠의 1·3·5를 그들 앞에 거꾸로 시도해 보았다.

바둑의 습관이란 묘한 것이다. 이 슈사쿠류의 포석은 백에게 불리하다는 통설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두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불리하다는 통설을 뒤집고 이기고 싶다는 기사들의 묘한 고집 때문일 것이다.

서로간에 기세가 넘치는 바둑이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포석이 끝나기도 전에 39수에서부터 패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10여 수가 더 진행되어 팻감이 부족한 백이 마지못해 굴복하기까지 치열한 패 싸움이 전개되었다. 일단 팻감 부족으로 백이 굴복했지만 불과 10여 수가 더 진행되어 또다시 흑이 패를 걸어 왔다.

종반 끝내기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무려 네 번의 패 싸움이 났다. 패의 결과는 백이 세 번을 굴복했고 흑도 한 번 양보하였다. 그 결과로 반면은 흑이 10여 집 가까이 우세한 국면이었다. 고수들간의 대국에서는 매우 큰 차이였다. 도저히 더 승부를 뒤집어 볼 곳이 없다고 판단한 다카하시가 조용히 돌을 거두어 패배를 자인했다. 일곱 시간에 걸친 긴 접전이었다.

그날 평사의 바둑은 네 번의 패 싸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편안하게 두어졌으나 순간 순간 승부의 기로에서 맥을 짚어 내는 솜씨만은 역시 일품이었다. 호리에 관장은 나름대로 평사의 기예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바둑이 끝나자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호리에 관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추선생의 바둑은 포석, 중반전, 끝내기 그리고 수를 읽는 세기(細技)까지 어느 한 구석도 나무랄 데가 없는 이미 완성된 바둑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추선생의 바둑은 이미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보아도 전혀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분하신 말씀이오.」

평사가 멋쩍어하며 관장의 말을 부인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회를 만나지 못했을 뿐 지금이라도 늦은 건 아닙니다. 추선생 나이에 전문기사가 되어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요.」

호리에는 은근히 평사를 추켜세운다.

「그건 그렇고 며칠 전 제가 제안했던 사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

「어떻습니까, 우리 산쓰이도장 출신으로 전문기사의 길을 걸어 보시는 게.」

마침내 호리에가 노골적으로 평사의 심사를 떠본다. 그것이 호리에 관장의 본래 목적이었다.

「추선생이 생각만 있으시다면 내가 길은 열어 드리리다. 우리 산쓰이 입장에서도 추선생이라면 환영이오.」

호리에가 평사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내년 봄 입단 심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추선생이 바둑의 수를 읽는 것만큼이나 현명한 판단을 내리리라 믿습니다.」

「…….」

평사가 묵묵히 일어나 거실 밖으로 나가자 호리에 관장이 다카하시에게 물었다.

「다카하시, 그의 바둑을 어떻게 보느냐?」

호리에의 느닷없는 질문에 다카하시가 무어라 쉽게 대답을 못한다.

「어떤 면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와 바둑을 두면서 일종의 신기(神氣) 같은 것이 전해져 왔습니다.」

호리에 관장이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내 그 동안 몇 차례 그의 기보를 검토해 보았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의 바둑은 살(殺)의 바둑이다. 예를 중시하는 사무라이의 바둑이 아니라 닌자의 바둑이다. 검으로 치면 도(道)도 없고 예(藝)도 없는 미치광이 바둑이다. 오직 죽이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두는 바둑이란 말이다. 승리만이 그가 신봉하는 유일신이다.」

다카하시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쳐 간다.

「그러나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의 기재는 내가 보아 온 사람 중에 단연 최고다.」

다카하시는 관장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라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게이오에게 들은 바로는 그가 조선의 무슨 도장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기억하느냐?」

「여목도장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쫓겨났다지?」

「예.」

호리에 관장의 시선이 멀리 창 너머 눈 내리는 산을 더듬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올해는 유독 일찍이 눈이 내리는군.」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내리는 눈 속에 차츰차츰 가리어지고 있었다.

북해도의 겨울은 추웠다. 거의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가 연일 몰아쳤다. 조선의 겨울도 추운 편에 속했지만 북해도의 겨울은 추위의 강도가 한층 더 심했다. 며칠씩 강추위가 몰아치다가 조금 기세가 누그러진다 싶으면 다시 추위가 밀려왔다. 게다가 자주 큰 눈이 내려 교통이 며칠씩 두절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쉴 새 없이 제설차가 돌아다니며 눈을 치우고 있었다.

겨울 한철을 평사는 고다쓰(이불 속에 놓는 화로)의 도움을 받아 지냈다. 화롯불을 갈아 주기 위해 준코가 드나들었고 그녀의 순종적이고 몸에 배인 친절을 접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평사는 그녀에게서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어났다.

그녀를 범하고 싶다는 육체적인 욕망도 아니었고 마음속 깊이 묻어나는 애정 또한 아니었다. 미모나 기품에 있어 준코는 화정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좋은 집안에서 잘 교육받은 정숙한 준코를 볼 때마다 평사는 문득 문득 조선에 두고 온 화정을 떠올렸고 애써 준코에 대한 감정을 자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