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별실에서 이필상과 마포 장의 한 판 대국이 벌어졌다. 한 판에 100만 원이 걸린 큰 판이었다.

이필상은 자신이 자원해서 승부에 나선 만큼 한껏 신중하게 판을 짜 나갔다. 누리끼리한 마포 장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런 지방도시에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강자를 만나 의외로 피곤한 접전을 벌이다 보니 미상불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

쌍방 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며 살얼음판을 딛는 심정으로 한 수 한 수를 착수했다. 오후가 한참 기울어질 때쯤 마포 장의 묘수가 연달아 판 위에 터졌다. 이필상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버텨 보지만 승부는 조금씩 마포 장 쪽으로 기울어졌다. 엄밀히 말해서 이필상이 못 두어서라기보다 마포 장의 반면 운영이 이필상보다는 한 수 위였다.

이필상이 통한의 심정으로 반상을 쏘아 본다.

바로 이것이다. 선천적인 감각의 부족, 이것이 내 한계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본기원 연구생 시절 마지막 입단의 고비를 못 넘고 좌절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발을 디딘 내기바둑에서 김헌자에게 1승 2패의 열세를 보였고 참혹하게도 양포에겐 3전 전패를 당했다.

좌절과 절망 속에 세상을 떠돌았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차라리 쓰레기처럼 뒹굴자고 이 기원 저 기원 기웃거리며 잔잔한 3, 4급 방내기꾼 행세를 하곤 했었다. 도대체 기재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인생이 참혹해진단 말인가.

이필상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승부에 져서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한탄이다.

애써 참으려 하지만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그와 동시에 툭, 하고 이필상의 손에서 힘없이 돌이 떨어졌다. 바둑을 시작한 지 꼬박 하루 반나절 만의 투석이었다.

「졌소이다.」

마포 장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어린다. 그에게도 이 승부는 힘겨웠으리라.

건물 주인 이 사장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필상의 어깨를 툭툭 친다.

「애썼소.」

그리고는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이필상에게 쥐어 준다.

「목욕이라도 하고 푹 쉬시구랴.」

이 사장이 이필상을 위로한다. 소실된 100만 원의 거액보다 패자의 눈물을 보고 같이 아파할 줄 아는 인간적인 전주다.

파장 후의 어수선하고 황막한 텅 빈 별실에서 권 원장이 우두커니 창 밖 하늘을 본다.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찌뿌둥하다. 어디선가 굵은 빗방울 하나가 창문에 부딪혀 깨어진다. 연이어 후두둑 후두둑 굵은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들리고 길을 가던 사람들이 황급히 흩어진다. 번쩍, 사지를 한껏 벌린 번갯불이 푸른 섬광을 발한다.

‘그래, 이제 방법이 없다. 준모를 앞세우는 수밖에.’

10여 년의 적공(積功)은 한순간 자신의 판단 착오로 공허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권 원장은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 길로 권 원장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기원에서는 작은 술자리가 있었다. 한때 이 기원에서 살다시피했다는 심 사장이 낸 술이었다. 무려 3년 이상을 이 기원에서 방내기꾼으로 세월을 죽였던 심 사장은 5년 전 심기일전하여 맨손으로 곡물과 채소류 도매시장에 뛰어들었다. 방내기꾼 시절에 터득한 상대의 수심을 보는 안목은 장사에 큰 밑천이 되었다. 그때 갈고 닦은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그는 그 계통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큰돈을 번 후에도 심 사장은 심심하면 고향을 찾는 심정으로 기원을 찾아와 술잔을 돌리곤 했다. 그가 돈이 많다는 걸 간파한 내기꾼들이 은근슬쩍 전주라도 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운을 떼 볼라치면 심 사장은 한마디로 그 제의를 묵살했다.

「당신은 아직 멀었어.」

심 사장이 제의를 물리칠 때 단골로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멀었다는 건지, 실력이 멀었다는 건지, 승부사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건지 한 번도 밝힌 적이 없다.

「작년 가을에 사 두었던 고추로 이번에 한몫 봤다면서요.」

송씨가 은근히 아부를 했다.

「한몫은 무슨, 그저 잔재미 좀 봤지.」

「작년에 고추농사가 풍작이라 헐값으로 샀을 텐데.」

「그래 봤자 별로 남는 거 없어. 돈이란 돌고 돌아야 하는데 한 군데 푹 썩혀 놨으니 겨울 한철 꽤 고전했지. 그나마 봄이라 제 값을 받은 거지.」

「한 열 배는 튀겼지요?」

송씨가 침을 꼴깍 삼키며 집요하게 캐묻는다.

「이 사람아, 술이나 빨게.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심 사장이 단호하게 송씨의 말을 자른다. 송씨가 머쓱해하며 물러앉는데 송씨의 짝패 최씨가 송씨에게 약을 올린다.

「그나저나 송가야, 너 이때까지 그렇게 이필상이하고 바둑 두면서도 그 사람이 그렇게 고순 줄 몰랐나?」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는데 내가 귀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냐.」

송씨가 히죽이 웃는다. 송씨의 표정엔 이필상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은 없다.

「묘수풀이 문제 내놓고 쏠쏠한 재미를 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최씨가 은근히 이필상을 씹는다. 이필상은 그 동안 술값이 궁하면 묘수풀이 문제를 내어 꽤 재미를 봤다.

「덕분에 자네 바둑도 상당히 늘었잖은가.」

송씨가 오히려 이필상을 감싼다.

「누구 얘긴가?」

심 사장이 궁금한지 끼여든다.

「이필상이라고 왜 눈썹이 굵다란 친구 있잖습니까.」

「아, 그 사람! 그 사람이 그렇게 고순가?」

「한때는 알아주던 바둑이랍니다. 이번에 원장님 일에 개입하면서 정체가 드러났지요.」

「원장 일이라니?」

「요새 원장하고 이 사장이 내기바둑에 완전히 엮였어요.」

최씨가 권 원장 일을 자초지종 늘어놓는다. 이야기를 다 들은 심 사장이 혀를 끌끌 찬다.

「지금이라도 손을 빼지 상대가 그렇게 고수라는데.」

「이미 그러기에도 늦은 모양이에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 잘 되든 잘못 되든 조만간 끝을 보겠지요.」

「비장의 카드?」

「권 원장 아들 준모 말입니다.」

순간 동삼이 흠칫한다. 준모라는 권 원장의 아들은 동삼도 만나 본 적이 있다. 아버지와 달리 강단이 있고 기재도 탁월한 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었는데 이미 제 아비의 바둑을 넘어선 지 오래고 근래에는 아버지를 두 점으로 접고 있었다. 원장이 심혈을 기울인 준재였다. 원장과 바둑을 두는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바둑이 끝나고 혼자 복기를 하고 있을 때 동삼이 꼭 한마디 해준 적이 있었다.

「편안하게 두어 봐.」

「무슨......?」

소년의 눈빛이 영롱하다.

「애써 모양을 갖추지 말라는 것이다.」

동삼은 소년이 중앙으로 두 칸 뛴 수를 한 칸 낮추어 가만히 밀어 내렸다. 한참 바둑판을 응시하던 소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눈으로 동삼을 바라봤다. 기원에서 약한 1급으로 통하는 동삼의 어디에서 그렇게 평범한 듯 싶으면서도 비범하고, 무딘가 하여 들여다보면 시퍼렇게 날이 선 날카로운 착점이 나오는지 의문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 이후로 권 원장은 동삼을 새삼스럽게 보는 눈치였다.

「이필상 그 사람 말을 빌리면 마포 장인가 뭔가 하는 그 치를 이기기 위해선 정상급 전문기사나 죽은 양포,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추 사범을 제외하고는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더군요.」

송씨가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꿈 같은 이야기군.」

심 사장이 탄식을 하다 말고 묻는다.

「김헌자라면 어떨까?」

「글쎄요…… 왜 줄이라도 닿습니까?」

「까짓거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면 안 될까?」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 준모가 나서면 모르긴 몰라도 승부가 될 겁니다. 장기전을 벌여야겠지만요.」

「그래도 그 어린 소년을 그런 승부에 내몬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순간 창 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는 동삼의 미간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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