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잃었는데.」

「돈 잃은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권 원장은 대전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성격이 모질지 못해 큰 승부와는 체질상 맞지 않았지만 바둑은 상당한 고수였다.

「상대가 누구야?」

「그저 오다가다 만난 사인데 세상에 내 그런 새끼는 처음 봤어.」

이 사장이 대뜸 상대방 욕을 한다.

「어쨌길래?」

「1·3·5(한방, 세방, 다섯방 홀수로 계산하는 방내기)를 두는데 나이도 어린 놈이 바둑 한 판 지면 한 판 내내 욕을 해대는데, 이건 뭐 이겨 놓고 더 당하는 기분이야.」

「좋잖은 매너군.」

「그건 또 아무 것도 아냐. 자기가 이길 때는 또 어떻고. 어떻게나 드러내 놓고 희희낙락하는지 성질 같아선 바둑판을 확 뒤엎어 버리고 한방 먹이고 싶은 심정이라니깐.」

「그래서?」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수십 번 속으로 다짐해도 막상 약 올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열받게 되고 그렇게 되니 결과는 뻔한 것 아닌가.」

「바둑은?」

「나하고 호선인데 그리 강한 것 같진 않아. 문제는 그놈의 주둥아리가 문제지.」

이 사장의 의도는 단순했다. 자기보다 훨씬 상수인 권 원장은 실력으로도 상대를 손쉽게 누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지간한 일로는 열받지 않는 권 원장의 성격이 문제의 사내에게 딱 적합한 상대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었다.

「얼마를 잃었어?」

「한 20만 원.」

「그렇게나 많이!」

다음날 이 사장의 소개로 만난 사내의 매너는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처음 한 판을 두어 패하자 사내는 대뜸,

「참! 개 씹 같은 바둑이네!」

「아이고! 이 썩어죽을 후레아들놈의 바둑아!」

하며 무작스럽게 욕을 해댔다. 자신의 악수가 나올 때마다 별의별 희한한 욕을 거침없이 했다는 이 사장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지간히 사람 좋은 권 원장도 결국 열을 받게 되었다. 첫날의 대국에서 오기가 생긴 권 원장은 세 판을 두어 도합 열한방을 이겼다.

「그때 한두 판으로 그만 끝을 냈어야 했는데…….」

권 원장이 후회를 한다.

「어떻게 해서 계속 두게 되었습니까?」

이필상이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씹으며 묻는다.

「이 친구 몇 판 지더니 판돈을 올리자는 거요. 이긴 건 차치하고 약이 올라 있던 참이라 그러마 했소.」

「전형적인 수법이군요.」

「글쎄 나도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지가 오래 됐지만 그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더랬소. 이 사장이 잃은 돈을 찾고 한 삼십 정도 더 올렸을 때 이 친구가 한 사람을 데려왔소. 누리끼리한 안색에 키만 멀대같이 삐쭉한 중년사내였소.」

「요즘 별실에서 바둑 두는 그 친구 말입니까?」

「그렇소.」

「그 친구가 마포 장이오.」

「도대체 마포 장이 누구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주리다. 아무튼 그래서요?」

「우리 쪽도 내가 이 사장 대신 들어선 처지라 그러라고 했소. 그게 사단이었소. 목돈이 줄줄 빠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방내기도 해 보고 판내기도 해 봤지만 속수무책이었소. 급기야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 사장이 이동휘뿐 아니라 조진명까지 들이대었지만 결과는 같았소.」

「조진명까지! 하긴 아무리 천하의 조진명이라도 마포 장에겐 어렵겠지.」

「조진명을 아시오?」

이번에는 권 원장이 이필상을 의아한 듯이 바라본다. 바둑 실력에 비해 이필상은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조진명(趙振明)은 한수(漢水) 이남에서 알아주는 내기바둑꾼이었다. 그가 한창 공부하던 시절, 한번은 바둑책을 보던 중 어떤 묘수풀이 문제가 풀리지 않자 집안 일을 모두 팽개치고 그 문제에만 몰두했다. 드디어 사흘 만에 기어이 정답을 얻어 낸 뒤 너무나 기뻐서 한없이 웃어대자 그의 아내는 남편이 바둑 때문에 미쳐 버린 줄 알고 통곡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 어쩔 작정입니까?」

권 원장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진다.

「어떡하긴. 본전을 찾든지 아니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든지 끝은 봐야지.」

「그런데 하나 의문이 있습니다. 원장님이 처음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꼭 원장님 때문에 이 사장님이 엮인 것 같은데 사실은 이 사장님 때문에 원장님이 개입한 것 아닙니까?」

「그건 아니오. 한 100만 원 정도 잃었을 때 이 사장이 손을 털려고 했소. 내가 부득부득 우긴 탓에 이 사장도 끌려 온 거요.」

「이 사장님은 요즘 뭐합니까?」

「이 사장도 이판사판이오. 최악의 경우엔 이 건물과 저기 길 건너 시장통 가게 터까지 다 날릴 작정을 하고 있소.」

이필상이 남은 한 방울의 술까지 알뜰하게 비운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 듯 말을 꺼낸다.

「나하고 한번 붙여 주십시오.」

「당신하고?」

권 원장이 놀란다.

「내 다시 큰 내기는 두지 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이필상의 표정이 침통하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요?」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긴다는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승부를 해 보겠소.」

이필상의 동문서답에 권 원장이 집요하게 묻는다.

「대관절 당신 누구요?」

「……한때는 일본기원에서 바둑 공부를 한 적이 있었고 내기바둑깨나 두었던 인생 낙오자쯤으로 알아 두십시오. 그저 한 세상 잊고 잔잔한 방내기나 두며 사는…….」

이필상을 바라보는 권 원장의 눈이 경이롭다.

마포 장이든 누구든 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 동삼은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위로 여러 사람의 얼굴이 두서 없이 겹쳐진다. 최해수, 박갑수, 정명운…… 그들의 얼굴이 쓸고 지나간 빈 공간을 한 얼굴이 그득하게 메운다. 설숙 스승의 그 차가운 얼굴이, 유독 정명운을 편애했던 스승의 일그러진 모습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정명운은 스승의 병이 위중함을 알면서도 국수전 도전기 때문에 스승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벽송까지 물려준 스승의 자애는 그렇게 허망한 결과를 낳았고 스승에게 버림받은 자신은 결국 흘러흘러 이 지방도시 기원 골방에서 얇은 모포 한 장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공백은 채워질 줄 모르고 깊고 허무한 고독이 한없이 자신을 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동삼은 모포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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