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문이 활짝 열리더니 황판수(黃判守)가 들어왔다. 그는 곧장 동삼이 바둑을 두는 쪽으로 다가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황판수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었다.

「이봐 추 사범. 하수들 데리고 뭐하나? 그만 두고 나랑 어디 좀 가지.」

황판수의 말에 상관 없이 동삼의 상대는 이미 진 바둑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동삼이 황판수를 만난 것은 1년 전이었다. 옥화와 헤어지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청량리 부근 대성(大成)기원에서 동삼과 황판수는 서로 알게 되었다.

황판수는 떠돌이 노름꾼이었다. 바둑 실력은 별로였지만 허구한날 기원에 죽치고 앉아서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큰 판에서 놀던 사람인데 어떤 일을 저지르고 기원으로 숨어 들었다고 했다.

황판수는 악바리였다. 잔돈푼이라도 걸리면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판돈을 긁어 갔다. 승부에서는 매정하리만큼 냉정했고 일단 표적을 정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했다. 기원에서는 그런 황판수에 대해 평판이 좋지 못했다.

어찌 보면 황판수는 노름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날따라 하루 종일 비가 내린 탓인지 기원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오후 무렵 한 사내가 들어왔다. 후줄근한 옷차림하며 고집스럽게 생긴 얼굴이 첫눈에 호구였다. 사내가 원장에게 물었다.

「바둑 한 판 두러 왔는데요.」

「몇 급 두시는데?」

「7급.」

동삼은 창가에 앉아 있었고, 황판수는 그 부근에서 재수패를 떼고 있었다.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은 사내가 상대하기엔 하나같이 버거운 고수들이었다.

「같은 급수가 없는데 조금만 기다려 보시구랴.」

원장의 난색에 사내는 하필 화투패를 떼고 있는 황판수 곁에 가서 앉는다.

「이런 떠그랄. 흑사리 쭉데기 떨어진 걸 보니 오늘 완전 재수 옴 붙었군, 옴 붙었어!」

황판수가 걸려 든 호구에게 슬슬 바람을 잡는다.

「뭐하시는 겁니까?」

사내가 먼저 초칠을 한다.

「보면 모르요. 재수패 떼고 있다 아니오.」

「혼자 하면 재미있습니까?」

「노는 것보담 낫지.」

「저, 차라리 저랑 바둑 한 판 안 두시겠습니까?」

「바둑?」

「예.」

「에이, 나 바둑 잘 못 둬요. 얼마 전에 막 배웠는걸. 얼핏 들으니 7급이나 되는 고수라는데 내가 상대가 되나. 그러지 말고 기다리는 동안 나하고 화투나 재미로 한 두어 판 돌립시다.」

실상 황판수는 3, 4급 수준의 바둑이었다. 사내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황판수 맞은편에 앉았다.

원장이 혀를 끌끌 찼다.

황판수가 일부러 져 주는 판을 제외하고 사내는 줄기차게 돈을 잃었다. 어지간하면 그만둘 법한데도 본전 생각 때문인지 사내는 마지막 한푼 남을 때까지 끝까지 버틴다. 화투를 치다가 황판수가 물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그건 왜 묻소?」

돈을 잃은 사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공사판에서 일을 하시오?」

작업복을 걸쳐 입은 사내의 검게 그을린 얼굴을 보고 황판수가 대충 한번 쳐 본다. 황판수는 화투패 보는 것도 귀신 같지만 사람 보는 통박도 그에 못잖다.

「내가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하고 화투하고 무슨 상관이오!」

사내가 화를 낸다.

사내는 황판수의 생각대로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비가 와서 공치는 날 기원에 바둑을 두러 왔다가 황판수에게 잘못 걸려 사내는 보름치 일당을 날려 버렸다. 황판수 앞에는 사내의 보름치 일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황판수가 원장을 돌아본다.

「원장님. 다방에 전화해서 커피 두 잔 시켜 주쇼.」

잠시 후 다방 여급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마시며 황판수가 사내에게 말했다.

「어디 가서 화투 치지 마슈. 특히 기원 같은 데선 말이오.」

황판수는 딴 돈으로 아가씨에게 커피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남은 돈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사내 쪽으로 밀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내를 버려 두고 황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툴툴거렸다.

「흑싸리 쭉데기 떨어진 게 맞긴 맞구나. 말짱 도루묵인 걸 보니…….」

어느새 비가 갠 기원 밖으로 황판수는 나가 버렸다. 동삼은 나가는 황판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며칠 후 동삼은 그 비슷한 사건을 또 한 번 목격했다.

밤만 되면 돌아가는 섯다판의 고정 멤버 중에 중학교 선생인 이인호라는 교사가 한 명 있었다. 이선생은 몇 개월에 걸친 화투로 거의 500만 환에 달하는 거액을 잃었다. 그는 중증의 노름환자였다.

그날도 이선생은 부진했다. 물(돈)이 말라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어디서 구한 급전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선생이 마지막 돈을 꺼내려고 지갑을 열었을 때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이선생의 아내와 두 아들이 양지 바른 햇빛 아래서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황판수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화투판에서 기묘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황판수와 이선생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남게 되면 황판수는 의도적으로 판을 키워 이선생을 밀었다. 황판수는 다른 사람의 기를 죽여 패를 꺾게 만들었고 이선생과 자신이 남으면 황판수는 패를 접었다. 게다가 황판수가 패를 돌리면 어김없이 이선생에게 이기는 패가 들어갔다.

순식간에 이선생 앞에 300만 환 가까운 거액이 쌓였다. 기분이 좋아 화장실을 가는 이선생을 따라 나가 황판수가 충고했다.

「그만하면 본전까진 못 돼도 어느 정도 봉창은 했을 테니 이제 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끗발이 오를 대로 오른 이선생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이오?」

「처자식을 생각하시오.」

「…….」

「여기는 당신 같은 초짜가 끼여 들 자리가 아니오. 집에 가서 가정이나 잘 보살피시오. 내 마지막 충고요. 잊지 마슈.」

그러나 이선생은 황판수의 충고를 무시했다.

황판수의 충고를 무시한 이선생은 자리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100만 환에 달하는 돈을 다시 잃었다. 그제서야 이선생은 이제까지 황판수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밀어 주었다는 걸 눈치챘다.

마침내 이선생은 용단을 내려 남은 200만 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면서 이선생은 황판수에게 고마움을 표하려 했지만 황판수는 이선생을 못 본 척 화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선생은 그 후 기원에 발길을 끊었다.

황판수가 어느 날 동삼이 거처하는 여관방으로 불쑥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