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한이 많았기로 꼭 사기바둑에까지 손을 대야만 했을까요?」

「왜, 실망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자네는 동삼에게서 인간을 보지 않고 환영을 보고자 했던 걸세.」

「…….」

「인간의 업은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네. 원효의 업이 파계였다면 동삼의 업은 스승과의 갈등이었네.」

해봉처사의 시선이 부드럽다. 박 화백은 그의 부드러운 시선에서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솔직히 벽송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과연 내 마음속에 한 점의 사욕도 없었는가?

박 화백은 자신 있게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떨치려고 박 화백은 화제를 돌렸다.

「최대포와 같이 그런 바둑에 손을 댄 기간은 얼마쯤 됩니까?」

「아마 도장에서 나온 지 수개월은 되었을 것이네.」

「그 당시에도 사기바둑을 두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재미있군요.」

「어느 시대나 사람 사는 곳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기 마련이지.」

사기바둑이란 말을 하다 보니 박 화백의 뇌리에 스쳐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배 기객 중에 이만우라는 40대 후반의 퇴물 내기바둑꾼이 있었다. 그가 하루는 한창 잘 나가는 선수인 김해범을 찾아가 통사정했다.

「김 사범. 날 한 번만 도와 주게. 이제 나이도 들었고 너무 지쳤네. 그만 청산하고 이 바닥에서 벗어나 고향에 내려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런데 알다시피 난 빈털터리 신세가 아닌가.」

「…….」

「날 한 번만 도와 주게.」

「어떻게요?」

「내가 지네.」

「선배가 져요? 재미있는 얘기로군. 까다로운 조건이면 싫소.」

「3·7일세.」

「내가 3이오?」

「그렇네.」

「나머지는?」

「내 몫일세.」

「…….」

「치수는 내가 선에 덤 오 목 받는 걸로 하세. 자네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 쪽 전주가 마다하지 않을 걸세.」

이만우가 제의하는 것은 선수들끼리 짜고 전주를 엮어 내는 속칭 전주 엎어치기였다.

퇴물이 되었다지만 이만우는 한때 알아주던 바둑이었다. 김해범이 선 고미 오 목에 이만우를 이기기는 어려운 치수였고 그걸 모를 리 없는 이만우측 전주는 김해범 쪽에서 선 고미를 접겠다면 얼씨구나 할 것이 자명했다.

「한 번만 도와 주게. 마음 잡고 고향에 내려가 아내랑 자식이랑 한 세상 잊고 살겠네.」

이만우의 전주는 자린고비였다. 이만우가 한창 잘 나갈 때 이만우를 선수로 내세워 많은 재미를 봤다. 그렇게 재미를 볼 때도 그 전주는 잡다한 구실을 붙여 분배를 야박하게 했다. 급기야 젊은 강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자 이만우의 전주는 아예 이만우를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이만우로서는 전주에게 이가 갈릴 법도 한 일이었다.

헤어질 때 이만우가 한 장의 기보를 내놓았다. 한 판의 바둑이 완벽히 기재된 그 기보는 몇 번의 패로 인해 승부가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백이 한 집을 이기는, 엎어치기에는 그럴 수 없이 어울리는 기보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뒤집어지기에 이만우의 전주가 아무리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엎어치기를 당한다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게 당연했다.

1주일 후에 있은 내기바둑에서 이만우는 극적으로 한 집을 졌다.

바둑이 끝나 갈 무렵부터 하얗게 질려 가던 이만우의 얼굴이 거의 백짓장 같았다. 천부의 연기였다. 이만우의 전주는 엎어치기 수법에 자신이 걸려 들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튿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김해범은 이만우를 전송했다.

버스가 막 움직이려 할 때 이만우가 말했다.

「언제 내려오면 한번 들르게. 대포나 한잔 하세.」

그 긴 세월 어두운 승부의 주변을 구비구비 돌았던 이만우의 두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김해범은 이만우의 호주머니에 봉투를 쑥 집어 넣었다.

「내려가면 잘 사슈.」

이만우를 태운 버스는 서서히 터미널을 빠져 나갔다. 김해범은 떠나는 선배를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7·3으로 나누기로 한 김해범의 3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