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운의 첫 수는 우상귀 화점. 시마즈의 첫 수는 좌상귀 소목이었다. 세 번째 수에서 잠시 망설이던 명운은 생각 끝에 세 번째 수를 좌하귀 소목에 착수했다. 이른바 대각선 포석이었다. 대부분의 대각선 포석은 난전으로 얽혀 들기가 십상이다. 아마 심기일전하려는 명운의 고심의 한 수 같았다.
시마즈가 빈 귀에 착수하자 명운은 즉각 좌하귀의 소목을 굳혔다. 시마즈가 우상귀 화점에 걸어 왔다. 당연한 걸침이었다.

제일 먼저 다가온 승부의 분수령은 흑의 41수였다. 시마즈가 선수랍시고 우상귀 흑의 진영을 씌워 왔을 때였다. 나무랄 데 없는 수였으며 당연히 흑이 받아 줄 자리였다. 명운의 얼굴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명운은 깊숙이 팔짱을 끼고 장고에 들어갔다.

얼마 후 명운의 손에서 돌이 떨어졌다.

관전하고 있던 아카기는 명운의 착수를 보며 내심 탄복했다. 어쩌면 귀의 사활이 걸릴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명운이 손을 빼서 우변의 화점 한 칸 위의 대세점을 점했기 때문이었다.

‘김재석이 정명운, 정명운 하더니 확실히 그의 기재는 빛나는 바가 있구나.’

결단력과 냉철함을 겸비한 상상하기 힘든 수였다. 우하귀의 백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을 견제하며 우상변 백 두 점을 씌우는 맞보기 수였다. 시마즈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반상 위로 머리를 바짝 디밀었다.

근 한 시간의 장고 끝에 시마즈는 우상변을 보강하지 않고 고집으로 귀의 화점을 젖혀 나갔다. 갑자기 반상 위에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명운이 귀를 적당히 수습했고 시마즈는 시마즈대로 우상변의 백 두 점을 보강하여 근거를 마련했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고수는 용호상박, 쌍방이 외나무 줄을 타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바둑은 다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공격과 수습, 타협과 반격으로 바둑이 얽혀 들었다. 워낙 난해하게 얽힌 판이어서 한 수만 실족해도 치명타를 입고 천길 나락으로 떨어질 살벌한 국면이었다.

시마즈는 과연 일본에서 촉망받는 기사답게 기력이 뛰어났다. 그의 한 수 한 수는 예리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흑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대었고 명운 또한 요소요소에서 급소를 짚어 나감으로써 백에게 굴복을 강요했다.

전투와 타협으로 승부의 외나무 다리를 위태롭게 걸어오던 중, 종반 들어 두 번째 분수령이 나타났다.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맞붙다가 큰 패가 난 것이었다.

몇 번이나 팻감이 오고 간 가운데 커다란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냉철한 시마즈가 명운의 팻감을 거부하고 이어 버렸다. 명운이 시마즈가 불청한 곳을 잡아 이득을 취하니 바둑은 다시 백중세로 어울렸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그 패의 결과는 백을 쥔 시마즈의 서너 집 득이었다. 때늦게 비세를 직감한 명운이 판세를 뒤집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승부수를 띄웠다. 시마즈는 침착하고 냉정한 자세로 명운의 승부수를 피해 근소한 우위를 끝까지 지켜 나갔다.

밤이 깊어 간다. 벌써 하루가 지나 이틀째 맞는 밤이었다.

바둑은 한 수 한 수 쌍방간에 끊임없이 장고가 계속됐다. 마침내 바둑이 정리될 시점에서 형세는 명운의 두 집 반 정도 비세였다.

미세하나마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시마즈가 여유를 부렸다.

「어떡할까요. 계속 두겠습니까, 아니면 일단 봉수를 할까요?」

「끝을 봅시다.」

명운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핏발이 가득한 명운의 눈을 보며 최해수는 괴로웠다. 도장의 명예를 양 어깨에 걸머진 명운의 몸부림이 그럴 수 없이 안타까웠다.

승부는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마즈의 실수가 없다면 이제 남은 주자는 최해수뿐이었다. 아직 실력을 점칠 수조차 없는 아카기는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마침내 명운은 무너지고 있었다.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근소한 비세를 뒤집으려는 마지막 안간힘은 결국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큰 패착 없이 밀렸으니 결국 기량의 차이랄 수밖에.

도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최해수가 낭패한 눈길로 멍하니 반상을 바라본다. 농담 좋아하는 박갑수와 장승표도 얼이 빠진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졌구나…… 끝이구나.

모두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명운까지 무너진 이 시점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깊은 절망에 빠졌다.

최해수가 명운에 비해 한 수 밀린다는 사실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김재석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어린 김원준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철거덕.

마침내 명운이 돌을 던졌다. 창백한 명운의 안색에는 실로 핏기 한 점 없었다. 휘청거리며 일어난 명운이 대청 아래로 내려간다. 어느 틈에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마치 혼이 빠진 듯 허적허적 걸어가던 명운이 휘청하는 순간 댓돌 아래로 굴렀다.

「형님!」

장승표가 명운을 부르며 달려갔다. 명운은 쓰러진 자리에서 혼절했다. 장승표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최해수가 혼절한 명운을 들쳐 업고 간다. 그 뒤를 장승표와 김원준이 따라가고 도장은 초상집을 방불케 한다.

대결을 시작한 지 보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도장의 맏형인 최해수밖에 없었다.

설숙도장의 마지막 주자 최해수와 시마즈의 대결은 그로부터 이틀 후 벌어졌다. 최해수는 비장한 각오로 출사표를 던졌다. 돌을 가리자 최해수 흑, 시마즈 백번이었다.

초반부터 최해수는 시간을 물 쓰듯 써 가며 물고 늘어졌다. 뻔한 장면에서도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최해수의 끈덕진 집념으로 바둑은 그런 대로 어울려 갔다. 하지만 기력의 차이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시마즈의 칼날 같은 행마가 최해수의 튼튼한 집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바둑은 조금씩 시마즈 쪽으로 기울어 갔다. 체력으로 잡고 늘어지기엔 한계가 있었지만 그나마 최해수는 장렬하게 버티고 있었다.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반상에는 승부의 명암이 확연히 드러났다. 흑을 쥔 최해수가 반면으로 한 집, 부족하여 덤을 계산하면 5집 반의 차이로 시마즈에게 밀리고 있었다. 아무리 판을 뒤집어 봐도 승부의 구실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최해수는 생각에 잠겼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돌을 던지자니 스승을 뵐 낯이 없고 계속 이러고 앉아 있자니 그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이를 두고 진퇴양난이라 하는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자신은 애초부터 바둑으로써 대성할 재목이 못 된다. 그 누구 못잖게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기예와는 인연이 없었던지 평생 물꼬를 트지 못하고 늘상 기재(棋才)들에게 가려 남 몰래 번민만 일삼았다. 다행히 자신을 따르는 동문 후배들이 많아 소외감은 피할 수 있었으나 어떨 때는 그것이 더 자신을 외롭게 했다.

자신이라고 왜 일가(一家)를 이루고 싶지 않겠는가. 일가를 이루어 후대에 길이 남을 명인이 되고자 하는 꿈이 없었겠는가, 허나 그것은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것. 섣불리 덤볐다간 평생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한다.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도 그 때문이리라.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건만 최해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 최해수를 억누른다. 기운이 빠지고 바둑판 위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 어서 빨리 끝이 나 차라리 현생(現生)의 모든 일을 잊고 싶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재석과 아카기는 시마즈의 승리를 확신하고 노골적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그 시간 설숙은 벽송을 앞에 놓고 깊은 번뇌에 젖어 있었다. 자신의 대에서 이런 비극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설숙은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믿었던 명운이 졌을 때부터 설숙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숙은 참담했다.

스승 여목께서는 중국으로 건너가 이름을 만대에 떨쳤고, 비록 스승으로부터 쫓겨난 제자라곤 하나 평사는 나라 없는 식민지 시대에 불세출의 승부사로서 수많은 왜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낙향하여 조상들이 지켜보는 선산 아래서 이다지도 험한 수모를 겪어야만 한단 말인가. 내 죽어 스승을 무슨 낯으로 뵐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스승의 면전에 발을 들인단 말인가…….

「스승님…….」

최해수의 비통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설숙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댓돌 아래 무릎을 꿇은 최해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설숙은 망연히 최해수를 내려다보았다. 선량한 제자를 원망하고픈 심정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제자가 얼마나 처절하게 버티었는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스승이었다.

「들어가거라.」

설숙은 방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