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지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한 평사였지만 그날 밤 손씨의 행동은 오랫동안 그의 기억에 남았다.

시체는 그의 말대로 야산 어딘가에 매장되었다. 청년의 참혹한 징벌을 지켜 본 사람들은 그날 이후 어떤 불평 불만도 없었고 숙사에서는 철저하게 입을 봉해 버렸다.

그때부터 손씨는 눈에 불을 켜고 청년을 고발한 일본놈 앞잡이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런 손씨의 그물에 걸린 사람이 바로 양가와 조장인 최팔용(崔八容)이었다.

평사가 속한 6조의 최팔용 조장은 과묵한 성격에 좀체로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향이 경남 산청(山淸) 출신이라는 것과 일본말을 일본인 이상으로 아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점 외에는 모든 것이 두꺼운 장막 속에 감추어진 인물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게 징용지의 일반적인 특성이었다.

그는 몇 가지 면에서 특이한 조장이었다. 우선 그는 대부분의 조선인 조장들과는 달리 일본인 반장에게 아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민족주의자라든가 선량한 편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악인에 가까웠다.
체격이 남달리 건장한 조장은 하루에 할당된 작업 목표량이 미달될 때는 같은 징용인 처지에 서슴없이 폭력을 자행했다. 그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노무자들은 그가 행사하는 완력이 무서워서도 열심히 목표량을 채웠고 그 때문에 일본인 반장은 그를 신임하는 편이었다.

그가 조장이 된 배경도 조금은 특이했다.

평사가 막 이곳으로 이송된 직후의 일이었다. 탈출을 방조한 혐의로 전임 조장이 총살형을 당하자 일본인 반장은 적당한 조장감을 물색하다가 묵묵히 일만 하고 있던 그를 후임 조장으로 발탁했는데 그게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통상 조장은 조원들 중에 나이가 지긋하고 통솔력 있는 사람을 뽑기 마련인데 아직 30대 초반에 불과한 그가 조장이 된다는 것은 상례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되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왜놈 앞잡이로 의심했다. 그러나 최 조장은 한 번도 동료들의 의심을 꺼려한다거나 그 의심을 불식시키려 한 적이 없었다.

그의 타고난 잔인성과 난폭한 기질은 악명이 높았다.

얼마 전 정척(定尺) 10.06 37(정척10.06이란 레일의 길이가 10.06미터임을 뜻하고 37규격이란 미터당 무게가 37킬로그램을 말한다.) 규격의 레일을 운반할 때였다.

그날의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사고였다.

정척 10.06은 무게가 370킬로그램으로 네 명이 메고 가기엔 좀 가볍고(작업을 지시하는 입장에서), 세 명이 메고 가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

일본인 반장은 작업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세 명을 한 조로 해서 무모하게 레일의 운반을 지시했다.

그쯤 되면 운반조는 반쯤 죽은 목숨이었다.

기(旣)가 설치된 선로 끝 부분에서 가설 지점까지 30∼40미터에 달하는 이동 거리는 그대로 죽음의 거리인 것이다. 아무리 일에는 요령이 따른다지만 이미 할당된 무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하다.

한 번 왕복에 운반조는 이미 반쯤 정신을 잃어버린다.

두 번 왕복에 체력은 완전히 바닥을 보이고 앞이 가물가물해져서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세 번째, 네 번째가 되면 완전 자포자기다. 깔려서 죽으면 죽는 거고 요행히 운이 좋으면 살아 남는다. 그것이 징용인의 숙명이었다.

다행히 세 번까지는 무사히 운반했던 운반 1조에서 기어이 사고가 터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운반 1조가 허물어졌고 중간에서 메고 가던 중국인 마오(毛)씨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레일에 깔려 버렸다. 순식간의 사고였다.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힘을 합쳐 레일을 치웠을 때 마오씨는 이미 기절해 버린 뒤였고 레일에 깔린 허벅지 아래는 제멋대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오더니 경계를 서고 있던 군인 한 사람이 달려왔다. 군인은 다짜고짜 쓰러진 마오씨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마오씨는 쓰러진 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군인은 한 번 더 세차게 마오씨를 걷어찼다. 끝내 반응이 없자 그는 멀리서 지켜 보고 있던 운전병에게 신호를 보냈다. 운전병이 트럭을 몰고 와 마오씨 옆에 바짝 붙였다.

마오씨를 걷어찼던 군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때마침 주위에 얼쩡거리던 양가에게 마오씨를 트럭에 실으라고 명령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양은 투덜거리며 마오씨의 옆구리를 양팔로 끼고 트럭 뒤 화물칸으로 마오씨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안 돼! 살릴 수 있는 사람이야!」

누군가 고함을 지르며 양을 확 떠밀었다. 지난해 이곳으로 끌려온 함경도 사람 백남석이었다. 그는 손가락이 남보다 한 개가 더 많아 동료들 사이에선 육손이라 불렸다.

불의의 일격을 받고 양이 나동그라졌다.

「이런 호로놈의 새끼가 있나!」

양은 욕을 하며 벌떡 일어나 육손의 멱살을 잡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군인이 내린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상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반항은 현장에서 사살되는 게 관례였다.

소란이 일어나자 마오씨를 차에 실으라고 지시했던 군인이 돌아오고 모두들 이제 육손이 죽었구나 생각할 즈음 최 조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죽고 싶나?」

조장이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음성은 낮았지만 조장의 눈에는 시퍼런 살기가 내비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살벌했던지 그제사 육손이 정신을 차렸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소원이라면 죽여 주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장은 육손이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단 한 차례의 주먹질로 육손이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거꾸러졌고, 넘어진 육손을 조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정사정 없이 짓이기기 시작했다.

군인이 다가오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에 육손은 난생 처음 당해 보는 무자비한 구타에 반죽음 상태가 되었고 군인이 ‘이제 그만하면 됐어.’ 하고 말할 때까지 조장의 발길질은 계속되었다.

다행히 육손이에 대한 문책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최 조장에 대해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최 조장은 이곳에 오기 전 오사카에 있는 한 폭력 조직에 몸을 담았다. 조장이 속해 있는 조직은 군부의 비호를 받는 우익 단체 산하 조직이었다.

조장은 조직의 일원으로 살인과 폭력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었다. 어떤 연유로 조직으로부터 축출당해 징용지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진 모르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조장이 거세당한 이유는 그가 일개 행동대원의 범주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보다 그럴 듯하고 구체적인 조장의 행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쨌든 조장에게는 항상 일본 앞잡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다녔다.

조장을 거론할 때마다 노골적인 적의감을 드러내는 육손이를 비롯한 대다수 징용인들은 조장을 미워했다. 징용인 중 몇몇은 평사에게도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평사 또한 조장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풀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앞잡이에 대한 손씨의 결론은 다시 양가와 조장으로 거리가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