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걸친 허름한 옷차림에 거무튀튀한 얼굴. 급한 물의 흐름으로 빠르게 이어지다가 이따금씩 갈라지는 탁한 목소리가 걸쭉한 막걸리를 들이키는 느낌을 준다. 지하철역 광장을 서성거리는 노숙자? 쿡 눌러쓴 낡은 모자 아래 열정으로 반짝이는 두 눈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런 이미지로부터 달아나기 어려웠으리라.

조세래(趙世來). 그는 한편의 인간드라마다. 93년 영화 ‘하얀전쟁'으로 대종상 각색상을 받은 실력파 시나리오 작가로서 오랜 조감독생활을 거쳐 바둑계에 숱한 화제를 뿌린 ‘명인'의 제작발표회를 갖고 국내영화사상 최초의 바둑영화 제작을 시도했으나 캐스팅 직전에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진한 아쉬움으로 피를 토하듯 그려낸 소설이 4년 뒤에 발표한 ‘역수(驛水)'.

영화에서 소설에서, 스스로 예고한 운명처럼 14년의 세월을 떠돌던 그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떠도는 물이 토해낸 이야기 ‘승부'다.

벌써, 그렇게…. 10년 맞네요. 세월 참 빠릅니다.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도 구상하고 뭐, 이것저것…. 살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러버렸네요.

- 최근 일간스포츠에 ‘승부'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계시죠? 10년 전에 출간된 소설 ‘역수'와 같은 내용이 아닌지….

아, 읽어보셨군요. 그러면 잘 아시겠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역수'를 내고난 뒤 미흡하다고 느낀 부분들을 조금씩 손보는 정도죠. 타이틀은, 몇 해 전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낼 때 책 제목이 너무 무겁다고 해서 ‘승부'로 바꾼 것인데 우여곡절 끝에 판권이 해지됐어요. 졸작입니다만 워낙 애착 가는 글이라서 그냥 묻어두기가 아까워 다시 선보이게 됐습니다.

- 무산되긴 했습니다만 영화 ‘명인'은 상당한 화제를 모았었죠. 얼핏, 드라마를 준비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 바둑이 관련된 내용입니까?

오래 전에 무산된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쉬움이 많은 건 사실이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바둑을 소재로 해서 ‘서편제'처럼 문화적 깊이가 있는 우리 영화를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으니까요. 드라마는 ‘JH필름'에서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승부'가 원작이죠.

- 축하드립니다.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TV 드라마는 유사장르니까…. 한때 프로를 꿈꿀 만큼 바둑을 좋아하고 내기바둑도 상당히 뒀다고 들었습니다. 소설 ‘승부'에도 그런 내용이 많더군요. 바둑드라마가 만들어져 어느 정도 한풀이는 되겠지만 여전히 영화 ‘명인'의 미련이 클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영화 쪽에서도 뭔가 하시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제가 만들고 싶은 바둑영화는 아직 꿈으로만 머물고 있으니까. 영화 쪽 일이라면…. 최근, 모 영화사와 계약이 돼서 차민수 4단을 모델로 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작비만 80억쯤 되는 대작이죠. 제가 시나리오 집필중입니다. 미국 현지로케가 많아서 제작비가 더 커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영화 ‘타짜'가 화투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포커이야기죠. 차민수 4단을 모델로 한 만큼 바둑도 상당 부분 들어가게 될 겁니다.

- 스스로 몸담고 있는 분야를 폄하하는 것으로 비칠 것 같아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시쳇말로 바둑, 정말 돈 안 됩니다. 대종상을 수상할 만큼 선택의 폭이 넓은 시나리오 작가가 왜 하필이면 바둑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는지 궁금합니다.

바둑영화를 꿈꾼 건 정말, 오래됐죠. ‘명인' 제작발표를 한 게 93년인데 그 10년 전쯤이니까…. 바둑은, 미칠 듯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요. 흔히 서양의 체스와 비교하지만 저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동양철학이 바둑의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 사람들은 서구문명의 물질주의를 추종하지만 그 물질주의의 정점에 서서 모든 폐해를 맛본 서양 사람들은 오히려 동양의 정신세계를 동경하지요. 바둑에는 그런 동양의, 한국의 정서가 깃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작품으로도 아주 좋은 소재죠. 개인적으론, 바둑을 통해 인간의 문제, 삶의 문제를 꼭 한번 다뤄보고 싶었고요.

- 그렇군요. 일본에서는 ‘고스트바둑왕'이라는 만화가 출간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만화영화까지 제작돼 국내에도 수입, 방영됐죠. 그 파급효과로 감소추세에 있던 일본의 바둑 꿈나무들이 수십만 명이나 늘어났다고 하더군요. 부러운 일입니다. 소설 ‘승부'는 일간스포츠에 이어 사이버오로에도 연재하게 됐는데요, 그 배경을 잠깐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졸작이지만 애착이 많은 소설이란 건 앞에서 말씀드렸고요. 저는 이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또 꼭 같은 내용이 아니더라도 그 영향을 받은 바둑영화가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인터넷연재를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바둑전문사이트 사이버오로를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진심으로 바둑을 좋아하는 네티즌들의 다양한 의견이 바둑 드라마나 영화제작에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맙습니다. 사이버오로 회원들과 함께 다시 한번 소설 ‘승부'의 연재에 감사드리며 하루 빨리 영상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터뷰/손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