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추동삼씨는 결국 고가를 떠났군요?」

「그렇다네.」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추동삼씨는 말년을 그렇게 떠돌아다녔습니까? 다시 전문기사가 되어 이름을 후세에 빛내거나, 하다 못해 후진양성이라도 고려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그 일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인간 세상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역행하려 들면 오히려 스스로를 망치게 되지. 탁세(濁世)에 휩쓸리다 보면 초발심이 사그러들기 마련이라네. 동삼이 원한 것은 구도이지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었네.」

「…….」

「무욕(無慾)이 대욕(大慾)일세.」

「…….」

「무욕 뒤엔 무엇이 숨어 있을까…….」

박 화백이 모호한 표정으로 해봉처사를 올려다본다.


배가 녹동항 부두를 서서히 미끄러져 나간다.

동삼은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배는 짙푸른 바다를 헤치고 소록도로 향하고 있었다.

황판수.

일찍이 약관의 나이로 노름의 거친 세계에 발을 디딘 이후, 최단 시일에 장목, 통목, 나기목 등 비기(秘技)를 수습하였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화투의 최고 기술이라 일컫는 천왕계(天王界)를 습득 구사하여 그 세계의 거목으로 수많은 화투꾼들에게 경원의 대상이 되었던 황판수. 그 황판수의 결혼이 내일이었다.

「이천!」

황판수의 눈이 재빨리 남은 화투장을 훑는다. 아홉 장. 역시 한 장은 김용택(金容宅)의 소매 속에 있다. 눈 빠른 황판수가 그걸 모를 리 없다.

황판수는 느긋하게 담배를 빼물며 자신의 패를 본다. 일땡. 하지만 황판수는 패를 엎었다. 김용택의 손엔 석 장이 있다. 섯다에서 손에 석 장이 있다는 건 칼자루를 쥔 거나 마찬가지다. 틀림없이 칠땡일 것이다.

「받고 사천!」

김용택이 사천 원을 화투판 위에 싣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매에서 나와야 할 화투장이 나오지 않는다. 간혹 남은 화투장 수를 헤아리기에 어지간하면 소매에서 나와야 할 시기였다.

점점 대담해지는군…… 약이 올랐다는 건가?

「죽었어.」

김용택의 상대가 패를 꺾는다.

「칠땡!」

「니기미! 장날마다 땡이고!」

경상도 출신 육군 소령이 투덜거리며 땡값을 준다. 나머지 사람도 땡값을 내놓는다. 하지만 칠땡을 잡고도 별로 득을 보지 못한 김용택의 속은 더 달 것이다. 손님이 있어야 돈을 먹을 것 아닌가.

김용택의 눈이 흘긋 황판수 앞의 돈에 머문다. 안 그런 척하지만 황판수의 돈을 바라보는 김용택의 눈에 쌍심지가 돋아 있다.

미치겠지. 미칠 거야. 땡을 잡으면 죽고, 족보 잡으면 땡으로 돈을 먹어 가니…… 가뭄에 논물 줄 듯이 돈이 빠질밖에……. 하지만 이 사람아. 시골 노름방에서 그런 어설픈 잔재주로 다른 사람 호주머니를 털어먹는 게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닐세.

황판수가 김용택을 만난 지는 한 달 전쯤이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포천에 들른 황판수가 지금 도박판에서 만난 사람이 김용택이었다.

황판수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김용택은 승률이 제일 좋은 노름꾼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는 몰라도 섯다를 하는데 소매 속에 한 장을 숨기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승률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황판수가 보기에 김용택의 속임수는 초급자 수준이었다. 소매 속이나 겨드랑이에 끼우는 재주는 화투 기술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황판수가 노름에 끼여 들면서 판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김용택은 그 동안 딴 돈뿐 아니라 이것 저것 팔아서 노름 밑천을 대는 눈치였다. 수심(水深)을 재 보니 거의 바닥에 와 있었다.

화투 패가 다시 두 번 돌아갔다. 여전히 열아홉 장이 돌아간다. 황판수의 오른쪽에 앉은 사내가 무심히 패를 섞는다. 황판수의 머리가 번개보다 빨리 회전한다.

8, 4, 3, 장…… 걸렸다.

「기리!」

선을 잡은 텁석부리 사내가 섞은 화투를 황판수 앞에 내민다. 무심한 척 황판수가 기리를 한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는 딴 생각이다. 기리를 하고 거둬 들이는 황판수의 손바닥엔 지남철에 끌린 쇠처럼 화투 한 장이 붙어 있다.

김용택의 소매에 구 한 장…… 다시 구 한 장을 주면 구땡…….

「천!」

선이 일단 천 원을 지른다.

「받고 이천!」

김용택이다.

「나는 죽었어.」

한 사람이 죽는다.

「도합 사천인가, 그럼 받고 팔천.」

황판수가 돈을 지르는데 김용택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팔천 맞소? ……받고 만 육천.」

경상도 육군 소령이다. 소령도 오땡이다.

「죽었어.」

이번에는 선을 잡은 텁석부리가 죽는다.

「만 육천 받고 삼만 이천.」

돈을 지르는 김용택의 소매에서 눈 깜빡할 새 화투장이 하나 나와 돈 밑에 섞인다. 아마 이번 판으로 결정 지을 모양이다. 누가 화투장 남은 수를 헤아리기라도 하면 파투가 날 수도 있으니까……. 순식간에 돈이 수북이 쌓인다.

「삼만 이천에 육만 사천.」

황판수가 에누리 없이 쳐 올린다.

「쫑돈이구마.」

오땡을 쥔 소령이 마지막 돈을 지른다. 소령의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라온다. 판이 워낙 커지니까 오땡도 안심 못하는 눈치다. 김용택이 판 위에 있는 자신의 남은 돈을 헤아린다.

「나도 막돈이오. 육만 사천에 사만 팔천 더. 이게 다요. 승부를 봅시다.」

황판수가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김용택이 마지막으로 밀어 넣은 사만 팔천을 화투판 위에 싣는다.

「뭐요?」

긴장으로 김용택의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허허, 왜 이러시나? 선부터 까야지.」

「오땡!」

소령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패를 까 보인다. 김용택과 황판수의 눈이 마주친다. 김용택의 눈은 이글이글 타는 횃불이고 황판수의 눈은 잔잔한 호수다.

「구땡!」

구 두 장을 내놓고 김용택의 손이 돈 앞으로 간다.

「잠깐. 내 패나 보고 돈을 가져가던지 하쇼.」

김용택의 손이 멈칫한다. 황판수가 손에 든 패를 한 장씩 내민다.

「이건 단풍이지…….」

김용택의 얼굴이 노래진다.

「이것도 단풍이요.」

바닥에 울긋불긋한 단풍 두 장이 기가 막히게 떨어진다. 김용택의 노랗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것으로 화투판은 끝이 났다. 사람들이 일어선다.

「잘 놀았소이다.」

황판수가 수북이 쌓인 돈을 챙겨 넣는다. 넣다 말고 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집어 소령과 김용택 앞에 한 장씩 내민다.

「개평이요.」

니글니글한 황판수의 목소리다. 김용택의 눈에 일순 날이 서다가 만다. 수표 한 장 받아 든 김용택이 두말 없이 방 밖으로 나간다.

그날 밤. 김용택은 술에 취해 흐느적흐느적 집으로 돌아갔다.

「씹할! 나 같은 놈 만난 것부터가 재수 옴 붙었지.」

김용택은 병든 아내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려 애쓰나 아내의 얼굴은 자꾸 되살아난다.

김용택은 길을 가다 말고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다.

그놈의 황판수……. 이제 남은 돈도 바닥이 났다. 개평으로 받은 돈 만 원이 전부다.

가슴에 천근 만근 돌을 올려 놓은 듯 답답하다. 애초에 노름으로 아내의 병수발을 하려 했던 게 잘못이었다.

처음에야 잘 나갔지. 우족(牛足)에다가 황구(黃狗), 구렁이까지 병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 주었다. 그런 정성 탓인지 아내의 병은 한결 나아졌다. 읍내 병원 의사 말로는 이렇게 병이 진척을 보이면 1년 안에 결핵이 완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것이다. 황판수라는 뜨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온 김용택은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본다. 선이 고운 윤곽, 커다란 눈, 오똑하게 날이 선 콧날, 차려 입고 나가면 포천 읍내가 훤해진다는 아내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