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를 끼고 조금 올라가면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오는데 무당들의 말을 빌리면 그 계곡은 영험이 있는 곳이라 했다. 게다가 물까지 흐르고 있어 산신에게 빌거나 용왕에게 빌거나 간에 드물게 있는 영소(靈所)라 했다. 자연 무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1년 사철 열흘이 멀다 하고 굿판이 벌어졌다. 밤늦게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패들도 있었고 아침 나절에 시작해서 해거름에 끝나는 패도 있었다.

정(鄭)씨 성을 쓰는 고수 노인도 그곳에서 굿을 하는 무당과 한패였다.

「여 누구 있능교?」

어느 날 저녁 고수 노인은 고가로 들어섰다. 동삼이 나가 보니 낯선 노인이었는데 손에 보따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노인이 불쑥 동삼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받으소.」

동삼이 가만히 있자 노인은 그제사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오늘 저 위에서 굿판이 안 있었능교? 제물이구마. 여 사람 사는 줄 모르고 맨날 아랫동네에만 제물을 나눠 줬다 아인교. 오늘 오다 보이 사람이 살길래 한번 와 봤소. 신성한 제물잉께 꼬끄랍게 생각지 말고 퍼뜩 받으소.」

원래 제물은 도로 가져가는 법이 없어 나누어 먹는 것이 상례였다. 노인은 반 강제로 동삼에게 보따리를 안긴 뒤 휘적휘적 사라졌다. 과연 보따리 안에는 고사떡과 고기, 유과, 과일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노인은 그 후로도 가끔씩 고가에 들러 제물을 나누어 주었다. 노인의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동삼은 조금씩 노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노인은 무당 굿판의 고수였다. 고향은 경북 안강(安康)이었고 지금은 10리 밖에 있는 면 소재지에 살고 있었다. 노인의 성씨가 정씨라는 것과 이곳에 흘러든 지 10년 정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노인이 고가에 여러 번 드나들고 나서였다.

막소주 한 됫병을 들고 정 노인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둑 잘 두는교?」

「길만 조금 압니다.」

정 노인은 손에 든 보따리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길만 쪼께 안다 카는거 보이 대단한 고순갑제. 원래 그 카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아인교.」

보따리 안에서 제법 그럴 듯한 고기와 건어물을 풀어놓으며 정 노인이 술을 청했다.

제법 취기가 오르자 정 노인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동삼에게 털어놓았다.

「이것도 팔잔지…… 내 젊은 때는 허퍼도 북채 잡는 신세가 될끼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정 노인이 소주를 한잔 쭉 들이켠 뒤 말을 이어 나간다.

「보소, 추선상. 나도 한때는 원대한 꿈이 있는 청년이었소. 이조 백자의 그 은은한 광택을 재현해 볼라꼬 날이면 날마다 도요에서 흙과 싸우고 가마 속의 불을 보며 밤을 지새웠구마. 고령(高靈) 저 아래쪽에 가마 협천(陜川)하고 맞닿은 곳에 쌍림(雙林)이라고 안 있능교. 거기서 팔자에도 없는 흙을 주물럭거릴 때였소.

아실랑가 몰라도 자기(瓷器)라는 기 한번 빠져 들마 빼도 박도 못하는 거구마. 우째 한번 색깔이 잘 나오마 시상천지가 다 내 꺼 같고, 색깔이 잘 안 나오마 손목데기를 댕강 뿐질러뿌고 싶을 정도로 좌절과 절망, 뭐 그런 거 속에 빠져 드는 기…… 사람 할 짓이 아이라요.

세월은 자꾸 흘러가고 속절없이 나이는 먹어 가고 죽으라꼬 색깔은 안 나오고 이라지도 못하고 저라지도 못하고 멍하니 맥을 놓고 있는데 어디선가 징소리, 요령소리, 북소리 같은 게 요란하게 들려 오더구마. 거기도 이런 계곡 비슷한 기 있었는데 가끔씩 굿판이 벌어졌소. 심심한데 구경이나 한번 해 볼라꼬 간기 고마 덜컥 덜미가 잡힛다 아인교.」

정 노인이 나즈막이 한숨을 쉰다.

「떡 가서 보이, 나중에 안긴데 산바람 막는 굿이었구마. 산바람이라 카는 거는 묘자리를 잘못 써서 원혼들이 애꿎은 후손들을 해코지하는 긴데 그걸 막는 굿이라요. 아무튼 큰무당의 춤사위도 좋았지만서도 제일 마음이 끌리는 기 고수의 북장단이었구마. 얼메나 흥겨운지 어깨춤이 절로 나드라 카이요. 그것도 운명인강. 한 판 굿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 봤겠능교.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구마.」

정 노인의 눈이 먼 기억을 더듬는 듯 가늘어졌다 .

「그렇게 흥겹게 한 판 굿을 구경하고 나이 다음 도자기가 한결 빛이 나두마. 그러나 그뿐이었소. 끊어진 백자의 비밀은 여전히 간 데 없고 그 절망에서 그나마 나를 구원해 주는 기 가끔 있는 굿판이었구마.

어느 날 굿판에서 중간중간 쉴 때 큰무당이 날 떡 보더이 그제사 한마디하데요……. 팔자에 없는 불이나 조물락거리고 있으이 되는 기 있나! 빨리 정신 차리라! 그 카데요. 안 그케도 천장만장 가마에서 달라 빼뿌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골백번이 더 나던 때였구마. 그 질로 가마를 떠나 이 짓으로 평생을 보내고 안 있겠능교.」

정 노인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며 흡사 몽환의 눈길이 되었다.

「내 이런 말 한다꼬 비웃지 마소. 지금도 북채를 들고 신명 나게 뚜들기다 보마 어느샌가 내 넋은 넘실거리는 가마 속 불길을 넘나들고 있소. 가마 속 불길만이겠능교. 팔만사천 번뇌를 벗어나 시방 삼세를 훨훨 날아다닌다꼬요.」

술이 거나하게 오른 정 노인이 넋두리를 하며 일어섰다.

「그 팔자나 이 팔자나 한 세상 살다 가마 다 똑같은 긴데…….」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정 노인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삽짝문을 밀고 나갔다.